직딩에세이#1
"삐"
"삐"
"삐"
'아..제길..내가 걸렸다니...'
공무원과 A4용지는 떼려야 뗄 수 없다. 세절기 앞에 선 공무원들이라면 이런 마음의 소리를 낸 적이 있을 것이다(나만 그런가^^;). 나는 세절기를 비우는 차례가 오지 않기를 바라며 종이를 파쇄한다. 그러다 삐, 삐, 삐 소리가 울려 퍼지면 똥 밟은 기분. 그 세절기 안 꽉 찬 통을 비워야 하기 때문이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은근히 귀찮은 일 중 하나가 세절기 통을 비우는 일이다. 비닐봉지에 종이 가루를 털어서 담고,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챙겨 와서 바닥을 쓸어야 한다. 정말 귀찮다. 너무 마음의 소리인가. 쩝.
어느 날이었다. 지난 서류들을 갈아버리려는데 세절기가 꽉 찼다는 신호를 보냈다.
"삐"
"삐"
"삐"
왜 이렇게 소리가 크게 들리는지! 잽싸게 세절기 문을 열었다. 특별한(?) 스킬을 가동했다. 파쇄된 종이들이 눈가루가 되어 쌓여있는 함을 꺼내서 위아래로 두세 번 흔들어줬다. 흔들어주니까 통의 윗부분에 어느 정도 공간이 생겼다.
'몇 번 더 세 절 할 수 있겠네.'
자기 합리화(?)를 하며 잽싸게 문을 닫았다.
물론 다른 직원들의 시선이 느껴지는 것 같아 등짝이 따가웠다.
'그냥 내가 비울 걸 그랬나.'
잠시 고뇌했다. 그냥 나쁜(?) 놈이 됐다. 착한 직원이 될 걸 그랬나.
'세절기는 하루 이틀 더 버틸 수 있다.'
세절기의 생명이 연장됐다. 이렇게 다시 한번 자기 합리화(?)를 하며 자리로 돌아왔다.
세절기 통을 비우는 것. 과연 누가 걸릴 것인가.
그런데 꼭 나 같은 놈이 세절기 통을 비우는 일에 걸리고야 만다.
이날 따라 갈아버려야 할 종이들이 많았다.
세절기 앞에 섰다.
A4용지를 집어 들었다.
세절기의 입에 A4용지의 모서리를 들이밀었다.
갈리는 소리. 뜨으으으으으으응.
그런데 느낌이 쎄했다.
어? 어라? 어어? 응?
종이가 말려들어가는 소리가 왠지 불안했다. 예전의 소리가 아니었다.
떡을 급하게 먹어서 목이 턱 막히는 느낌이었다.
사물함의 빗자루 몸통이 떠올랐다.
투명한 종이비닐이 아른거렸다.
바닥에 흩뿌려진 종이가루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빗자루, 쓰레받기. 우리 곧 만나겠구나.'
세절기 통이 꽉 차서 그 통을 흔들어도 소용없으리라는 직감.
안 좋은 느낌은 잘 들어맞는 이 쓸데없는 촉.
"삐"
"삐"
"삐"
역시나였다. 잽싸게 세절기 문을 열었다.
통을 봤더니 종이 가루가 꽉 찼다.
역시 흔들었다. 더 열렬하게 흔들었다.
소싯적 술 먹고 나이트클럽에서 흔들듯이 흔들었다.
종이가루가 어깨 위 비듬처럼 바닥에 떨어졌다.
공간이 안 생겼다.
패스를 줄 데가 없어 답답해하는 메시의 마음이었다.
결국 포기했다.
세절기의 스위치를 껐다.
통을 꺼냈다.
사물함 쪽으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빗자루와 비닐봉지, 쓰레받기를 꺼냈다.
다시 터벅터벅 세절기 앞에 섰다.
허리를 굽혔다.
통에서 종이가루가 가득 담긴 비닐봉지를 꺼냈다.
묶었다.
바닥에 떨어진 종이가루들을 쓸었다.
새벽 아침에 일어나 연병장의 눈을 쓸던 말년 병장 때 내 모습이 생각났다.
바닥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종이가루들을 내려다봤다.
손가락이 핀셋이 됐다. 아주 섬세하게 자잘한 종이 가루를 집었다.
비닐봉지를 갈아 끼웠다.
세절기 스위치를 켰다.
위이 이이이 잉.
다시 세절기가 숨을 쉬었다.
세절기 문을 닫았다.
보따리장수처럼 종이가루가 가득 든 비닐봉지를 들었다.
청소 아주머니가 치우실 수 있도록 쓰레기 분리수거함 옆에 놔뒀다.
진작에 내가 먼저 세절기 통을 비웠으면 다른 직원이 편했을 것을.
사실 세절기 통이 다 찼다 싶으면 내가 먼저 비웠어야 했는데. 이게 뭐라고. 쩝.
너무 이기적이었다.
반성했다.
'다음부터는 솔선수범에서 꽉 찼다 싶으면 내가 먼저 세절기 통을 비워야지.'
이런 마음을 품었다.
며칠 뒤였다.
나는 종이뭉치를 들고 다시 세절기 앞에 섰다.
앗. 이날도 달팽이관을 송곳으로 찌르는 소리.
"삐"
"삐"
"삐"
퀴즈. 나는 과연 어떻게 했을까.
내가 당연하다는 듯이 청수도구가 든 사물함을 향해 걸어갔을까.
내가 당연하다는듯이 세절기 통을 열고 그 함을 세차게 흔들었을까.
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