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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번역하는 집사 Jun 11. 2021

나는 어떻게 영상 번역가가 되었을까_Part 2

달콤했던 3개월간의 해외여행이 끝난 후 한국으로 돌아오자 막연했던 고민이 현실로 다가왔습니다. 프리랜서 번역가로 일하겠다는 생각만 했지, 여전히 구체적인 계획은 없었습니다. 아무래도 기술 번역 분야가 익숙하다 보니 관련 업계의 프리랜서 공고부터 찾아봤습니다. 여기저기에 지원을 했는데, 연락이 오지 않는 곳도 있었고 단가를 심하게 낮게 책정해서 협상이 결렬된 곳도 있었습니다. 세월이 흘러도 번역 업계의 단가만은 참 한결같아서 새삼 씁쓸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예전 회사에서 프리랜서로 일을 해달라고 연락이 왔습니다. 아무런 경제 활동 없이 집에 붙어 있는 게 눈치 보이기도 해서 수락했습니다. 원래 계획은 하루에 4시간 정도 가볍게 감수만 하려고 했는데, 나중엔 번역 요청까지 오고 결국 또 밤늦게까지 일하게 됐습니다. 퇴사 후에 일을 더 많이 하다 보니 오히려 회사에 다닐 때보다 수입은 더 좋았지만 말만 프리랜서지, 회사에서 일하는 것과 별 차이가 없더군요.




그렇게 늦게까지 일하고 느지막하게 일어나는 불규칙한 생활을 반복하던 중에 우연히 어떤 미드에 빠지게 됐습니다. 평소처럼 텔레비전을 보며 아침을 먹으려고 채널을 돌리다가 당시 OCN에서 방영하던 NCIS를 보게 됐습니다. 매일 아침마다 몇 편씩 연속으로 방영해 주는데 너무 재밌더군요. 수사물을 썩 좋아하진 않았지만, 그 드라마에 푹 빠져서 밤을 새워가며 몇 시즌을 정주행했습니다. 그때 불현듯 대학 때 유일하게 안 들었던 영상 번역 강의가 떠올랐습니다. 번역 수업이라면 무조건 들었는데, 영상 번역은 하도 어렵단 얘길 많이 들어서 수강할 엄두도 못 냈거든요. 그런데 영상 번역을 가르치는 교수님께서 하시는 특강을 우연히 듣게 되었고, 그때 번역하신 작품을 예로 들으며 설명하셨는데 그게 CIA 시리즈였습니다. 만약 그때 그 강의를 들었더라면 어땠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영상 번역을 공부하려고 알아봤고, 바로 영상 번역 아카데미에 등록했습니다. 등록할 때만 해도 영상 번역가로 일해야겠단 생각보다는 예전에 못 들었던 영상 번역에 대한 아쉬움을 털어내고, 수업을 들으면서 이 분야가 어떤지 알아보자는 마음이 더 컸습니다.


기술 번역 프리랜서로 일하며 영상 번역 공부를 병행해야 해서 초반엔 많이 힘들었습니다. 매주 주어지는 번역 숙제에 일까지 하려니 정신이 없었습니다. 기술 번역과는 번역 스타일도, 쓰는 프로그램도 너무나도 달라서 적응하느라 고생했지만, 수업을 듣다 보니 영상 번역 분야가 너무 재밌었습니다. 딱딱한 텍스트가 많은 기술 번역과 달리 영상을 보며 번역하는 작업이 생동감 있게 느껴졌습니다. 물론 처음엔 고민하느라 번역 속도가 너무 안 나서 1분을 번역하는 것도 참 오래 걸렸죠.


그렇게 서서히 영상 번역을 익혀갈 때쯤 결심이 흔들리는 순간도 있었습니다. 기술 번역 프리랜서로 일을 알아볼 당시에 G기업에 지원한 적이 있는데, 그 회사에서 면접을 보라고 연락이 왔습니다. 복지랑 카페테리아가 좋기로 유명한 회사라 무척이나 흔들렸습니다. 사실 몇 개월 전에만 연락이 왔어도 당장 면접을 봤겠지만, 이미 영상 번역 쪽으로 마음을 굳혔고 영상 번역 회사랑 막 일을 시작하던 시기라 결국 면접은 포기했습니다. 뭐, 면접 봤어도 떨어졌을지도 모르겠지만요;




제가 영상 번역가가 된 길을 돌아보면 모험의 연속이었던 것 같습니다. 약간의 충동적인 퇴사와 더 충동적인 3개월간의 해외여행. 그리고 우연히 본 미드에 빠져 영상 번역을 공부하다가 영상 번역가가 되기로 결심했고, 가벼운 마음으로 넣은 이력서로 일감까지 받게 됐으니까요. 참고로 엄청나게 저조했던 영상 번역 수입이 기술 번역 수입을 초과하면서 기술 번역 일은 그만뒀습니다. 어찌 보면 모든 일이 자연스럽게 흘러 여기까지 왔지만, 그 과정에서 순탄치 않은 일도 많았습니다. 그동안 프리랜서 영상 번역가로 일하면서 이 일을 선택한 걸 한 번도 후회한 적 없다고 할 순 없지만, 다시 퇴사를 결정할 수 있는 순간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똑같은 선택을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 일을 하면서 힘든 시간도 많았지만, 오롯이 번역가만이 알 수 있는 그런 행복감도 느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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