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익은 듯 낯설게, 우리 어디서 본 적 있지 않나요
"우리, 어디서 만난 적 있던가요" 클래식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통하는 작업 문장. 사실 작업 멘트 내용보다는 작업을 거는 사람이 얼마나 매력적인지가 더 승률에 영향을 미치겠지만.
그런데 이런 작업이 아니더라도, 호감 가는 사람은 어디서 본 듯한 인상을 대체로 갖고 있지 않은가. 친근함은 경계심을 풀어 주고, 좀 더 가깝게 다가가게 해면서도 더 알아보고 싶게 만들어 준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대체로 인기가 많다.
물론, 태어나서 처음 보는 미모를 가진 사람들 또한 친근감을 가진 사람들과는 다른 의미에서 인기가 있다. 범접하기 힘든 경외감 같은 것이라고 할까.
트렌드도 비슷한 것 같다. 여태껏 보지도 경험하지도 못했던 새로운 브랜드, 서비스, 콘텐츠, 경험, 스타일 등이 충격을 주며 트렌드를 장악하기도 하고, 뭔가 익숙함을 살짝 비튼, 그래서 친근함으로 소비되는 브랜드, 서비스, 스타일들이 트렌드가 되기도 한다.
전자는 어쩌면 트렌드라기보다는 이노베이터 또는 혁신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맞을 수도 있겠다. 소니 워크맨, 아이폰, 요즘의 Generative AI처럼 인간의 생활을 바꾼 기술도 있고, 락앤롤, 힙합, 그런지록, 팝아트, 비디오 아트처럼 기존에 있던 것을 완전히 뒤집어서 세상을 놀라게 한 문화적 트렌드들처럼 후세에도 계속 전해지는 그런 '사조'들 말이다.
마케팅적 관점에서의 '트렌드', 다수의 사람들이 비슷한 시기에 관심과 열정을 갖고 소비하는 브랜드, 서비스, 제품, 경험, 스타일 등은 후자가 더 맞는 것 같다. 파도풀에서 몸을 맡기듯 떠있다 보면 이 물결에서 저 물결로 자연스럽게 옮겨 가게 되는 그런 트렌드 말이다.
트렌드, 다시 말해 이 "유행"이라는 것이 예전에는 대주기를 30년, 소주기를 10년으로 봤다고 한다. 30년이 보통 한 세대 (부모 자식 간의 평균 나이 차이) 이기 때문에 30년을 기점으로 "대유행"이 바뀐다는 것이다. 90년대에도 '복고풍'(요즘 언어로는 레트로)이라는 것이 유행했는데 그때 유행한 레트로는 60년 대풍이었다. 미니스커트와 60년대 배경 티브이 드드라마 유행 정도로 그치긴 했지만.
그런데 전 세계가 리얼 타임으로 묶인 2020년대의 트렌드의 양상은 좀 다른 것 같다.
1. 우선, 트렌드의 대주기는 20년으로 짧아진 모양새다.
2010년대의 응답하라 시리즈는 90년대가 배경이었고, 90년대 스타들의 컴백이 전 세계적으로 이어진 것도 2010년대였다.
2020년대에 들어서는 2000년대의 정서, 느낌, 말투, 스타일이 휘어잡고 있다. 최근 새로 시작한 SNL 시즌 5의 "ㄱ 나니"는 2000년대 초반 싸이월드와 하두리 감성을 그대로 고증하며 인기몰이 중이다. 길은지 캐릭터가 가져온 본더치는 정말 재유행할 조짐을 보이고, 한동안 부끄러워서 다 내다 버렸던 트루릴리전도 2021년에 화려하게 돌아왔다.
2. 트렌드의 '소주기'는 10년에서 5년으로 짧아졌다고 한다.
이 '소주기'란 무엇인가 하니, 10년 (지금은 5년) 전에 유행하던 것이 지금 보면 가장 촌스럽다는 얘기다.
2024년 기준으로 현재 가장 촌스러운 트렌드는 2019-2020년, 코로나 직전 유행하던 트렌드인 셈이다.
대표적인 2019년 트렌드로는, 스카이 캐슬 "저를 전적으로 믿으셔야 합니다", "괄도 네넴띤" "라떼 이즈 홀스 (꼰대의 본격 부상)", 사딸라, 염따의 "플렉스", 그리고.. 이젠 카톡 이모지로 쓰기도 꺼려지는 당시의 국민영웅 "펭수"가 있었다.
한 때 광고 모델로 서로 모셔가려고 안달이었던 펭수를 지금 모델로 쓰는 브랜드가 있다면 어떤 생각이 들까?
"부장님 라떼"를 지금 출시한다면 어떤 반응을 받을까?
3. "지금"의 유행을 보자면 (X-Y-Z 세대 상관없이), 20년 대주기 기준으로 2000년대의 감성을 베이스로 하면서도, 뭔가 그때와는 다른 "낯섬"을 한 방울 첨가한 것 같다.
플래그십 스토어까지 생긴 마리떼 프랑소와 저버는 20년도 한참 전인, 30년 전쯤인 90년대 초중반에 유행했던 프리미엄진이다. 프랑스 브랜드였고, 앞 지퍼 쪽에 "마리떼 프랑소와 저버" 로고가 박음질되어 있어서 그걸 보여 주려고 꼭 티셔츠 앞은 바지 안으로 턱 인해서 입고 다녔던 옷이다. 그런데 이 브랜드가 2020년대에 한국에서 다시 태어났다. 한국에서 브랜드 판권을 아예 사들여서 진 만이 아닌, 주로 여성 스트리트 캐주얼 위주로 다양한 컬렉션을 전개해서 사랑받고 있다.
요즘 서울 시내 핫스폿 옥외 광고를 점령하고 있는 제니의 샤넬 "프리미에르" 시계 광고. 이 프리미에르 시계도 90년대 초중반에 연예인들 및 부유층 사이에서 핫했던 모델이었다. 시계판이 작아서 한동안 큰 시계판이 유행하던 시장에서 사라지는가 했더니, MZ 들의 "낯익은 것 같지만 낯섬"을 좋아하는 구미에 맞았는지 큰 인기라고 한다.
오컬트 영화로는 드물게 천만 관객을 넘긴 "파묘"도, 애국심을 자극하는 시대를 아우르는 기본 정서는 차치하더라도, 뭔가 할머니 세대에서나 했을 법한 굿판을 김고은과 이도현이 요즘 스타일로 재해석해서 (컨버스를 신은 무녀가 하는 굿이라니! 야구선수 출신의 박수무당이라니!) 등장과 함께 최민식과 유해진이 기성세대의 스타일을 잘 엮어서, 기존에 많이 보아 왔던 익숙함 베이스에 약간의 새로움을 섞어 호기심을 자극하면서도 소화하기 힘든 스타일이 아닌 것이 니치적 장르임에도 천만 관객이라는 대중적 성공을 거두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무엇이 유행할지를 미리 알 순 없지만, 마케팅을 업으로 삼고 있다면, 5년 전 유행 아이템을 마케팅에 활용하는 것만 피해도 중간은 가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이상 오늘의 허접 생각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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