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 간격으로 숲 속에서 발견된 두 개의 드럼통
보스턴에서 북쪽으로 약 1시간 30분 정도 거리에 뉴햄프셔주의 알렌스타운(Allenstown, NH)라는 조그마한 도시가 있다. 인구가 오천 명이 채 되지 않는 조그마한 동네인데 이 도시 동쪽에 베어 브룩(Bear Brook) 주립공원이 위치하고 있다. 그런데 지난 1985년 이 공원에서 의문의 드럼통이 하나 발견되었다.
이 드럼통을 처음 발견한 사람은 그 동네에 살고 있던 아이들이었다. 1985년 여름 어느 날 산속에서 술래잡기와 같은 놀이들을 하다가 이상한 드럼통이 하나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아이들은 이것이 뭘까 싶어 살펴보니 뚜껑 사이로 비닐이 삐져나와 있는 것이 보였다. 그래서 그것을 잡아당겨 뚜껑을 열려고 하니 비닐이 찢어지며 썩은 우유 냄새가 났다. 아이들은 발로 차서 드럼통을 넘어 뜨렸는데 뚜껑이 조금 더 열렸는지 뭔가 하얀 것이 보이는 듯했다. 그저 썩은 우유가 들어있나 싶어 아이들은 모두 자리를 떠났다.
몇 주가 지난 1985년 11월 10일. 알렌스타운의 경찰관이었던 론 몽트플래서(Ron Montplaisir)는 베어 브룩 공원에서 뭔가 이상한 것이 발견되었다는 한 통의 전화를 받고 그곳으로 향했다. 현장에서 가서 보니 한 사냥꾼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사냥꾼은 론에게 숲 속에서 드럼통을 발견했는데 안에 시체 같은 것이 들어있는 것 같다고 하였다.
론은 혼자서 숲에 들어가 땅에 넘어져 있는 드럼통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 안에 있는 비닐을 열어보았는데 그 안에서는 매우 부패한 시신의 얼굴이 자신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비닐을 열었을 때 다 부패해버린
시신의 얼굴이 나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었어요.
나는 그 안에 부패한 시체가 나를 바라보고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어요.
나는 아직도 그 장면을 생생히 떠올릴 수 있어요.
나는 정확히 그 얼굴이 어땠는지 떠올릴 수 있어요....
정말 평생 잊히지 않는 기억일 것이다.
경찰은 드럼통에서 두 구의 시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하나는 성인 여성의 시신이었고 다른 하나는 9~11세로 추정되는 어린 여자 아이의 시신이었다. 시신은 모두 나체 상태였으며 둔부에 흉기로 가격을 당한 흔적이 있었다. 그리고 드럼통 안에 들어갈 수 있도록 절단이 된 상태였다.
경찰은 즉시 조사에 착수했다. 시신들이 엄마와 딸로 보였기 때문에 모녀가 함께 실종된 신고 내역들을 조사하였다. 그리고 현장과 동네 사람들을 대상으로 조사를 벌였지만 전혀 소득이 없었다. 게다가 하필 드럼통이 발견된 지역 인근에서 비슷한 시기에 또 다른 살인사건이 발생하였기 때문에 경찰의 주의가 분산되었다. 살인 사건은커녕 강력 범죄도 잘 일어나지 않는 시골 동네에서 두 건의 살인 사건이 동시에 벌어졌으니 두 사건이 연관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의심이 되었다. 결국 이 사건은 전혀 진전 없이, 피해자들의 신분도 알아내지 못한 채 점점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히게 되었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2000년. 뉴햄프셔주 경찰(State Trooper)로 일하던 존 코디(John Cody)는 중요 범죄 유닛(Major Crime Unit)에 배정받게 되었다. 당시에는 이 유닛에 새롭게 배정받으면 장기 미제 사건 1~2개를 맡는 전통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15년 전 베어 브룩에서 발생했던 이 살인 사건을 맡게 되었다
어느 날 그는 사건을 더 자세히 파악하고자 15년 전 드럼통이 발견된 장소를 찾았다. 그리고 사건 현장에서 옛날 경찰 기록들을 읽으며 다시 한번 주변을 살폈다. 그런데 그는 첫 번째 드럼통이 발견되었던 곳에서 약 100m 정도밖에 떨어지지 않은 장소에서 15년 전 발견되었던 드럼통과 똑같은 크기, 똑같은 색깔의 드럼통을 하나 더 발견하게 된다.
드럼통을 열어보니 그곳에는 놀랍게도 또 다른 시체들이 들어있었다.
조사 결과 두 번째 드럼통에서 발견된 시신들은 2~4세로 보이는 여자 아이와 1~3세로 보이는 여자 아이의 시신으로 판명되었다. 먼저 발견된 시신들과 마찬가지로 둔부를 가격 당하여 살해당한 것으로 보였다. 시신이 너무 오래되어서 정확히 언제 버려진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여러 정황을 고려했을 때 첫 번째 드럼통과 같은 시기(적어도 비슷한 시기)에 버려진 것이라고 추측되었다.
15년 만에 발견된 이 시신들로 인하여 뉴햄프셔 주 경찰은 분명 난리가 났을 것이다. 겨우 100m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드럼통을 어떻게 15년 동안이나 발견하지 못했을까? 혹시 한 가족이 모두 살해를 당한 것일까? 도대체 이렇게 잔인한 일을 한 살인범은 누굴까?
아니 그 이전에 도대체 이 피해자들은 누구란 말인가?
경찰은 다시 조사에 착수했지만 15년 전과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아무런 소득 없이 끝나고 말았다. 다만 시간이 흐른 후 DNA 분석을 통해 성인 여성과 가장 큰 여자 아이 그리고 가장 어린 여자 아이는 모두 모녀 관계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그런데 정말 이유를 알 수 없게도 중간의 여자 아이는 나머지 피해자들과는 아무련 혈연관계가 없었다.
비록 큰 진전은 없었지만 이후에도 경찰의 노력은 계속되었다. 2015년 경찰은 고고학에서 쓰이는 방사성 동위원소 분석을 이용하여 피해자들이 살았던 지역이나 살해 직전에 머물렀던 지역 등을 알아냈다. 피해자들의 신분을 확인할 길이 없었기 때문에 혹시 유럽이나 남미에서 온 사람들이 아닐까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방사성 동위원소 검사 결과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이라고 확인되었다. 경찰은 혹시 피해자들이 살았던 지역에서 제보가 들어오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결국 이번에도 이들의 신원을 파악하는데 실패하고 만다(*).
(*) 사실 이 방사성 동위원소 검사 방법도 매우 흥미롭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 국내에도 유연 휘발유(Leaded Gasoline, 납이 포함된 휘발유)가 있었다. 당시 대기 중에 배출된 납들이 지금까지도 조금씩 사람 몸에 축적된다고 한다. 이때 대륙 별로 사용된 납이 조금씩 다르기 때문에 이를 이용해서 시신들이 북미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와 비슷한 방법으로 시신 속에 남아 있는 산소-18을 이용해서 대략적으로 미국 어느 지역에서 살았는지 알 수 있다고 한다.
이 사건은 또다시 미궁에 빠지는 듯하였지만 놀랍게도 뉴햄프셔에서 5,000km 이상 떨어진 캘리포니아에서 사건의 실마리가 풀리고 있었다.
앞의 글들에서 이야기한 것과 같이 2002년에 전은순 씨를 살해한 래리 벤터는 사실 1986년 리사를 버리고 도망간 고든 젠슨과 동일한 사람이었다. 그 이후 DNA 검사를 통하여 고든 젠슨이 리사의 친아버지가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고든 젠슨은 2010년 감옥에서 사망할 때까지 리사가 누구인지 밝히지 않았기 때문에 리사를 원래 신분을 찾는 길은 영영 없어진 듯하였다. 하지만 2016년 DNA를 비교하여 가까운 친척들을 찾는 유전자 가계도(Genetic Genealogy)를 이용하여 결국 뉴햄프셔에 살고 있는 리사의 외할아버지를 찾을 수 있었다.
한편 이를 통해 리사의 신분을 알아낸 피트 해들리(Peter Hadely)는 뉴햄프셔 경찰에 리사와 리사의 엄마가 뉴햄프셔에서 왔다는 사실을 알렸다. 곧 뉴햄프셔 경찰은 리사 엄마의 친척들을 찾아 당시 어떤 일이 었는지 물어보았다. 리사의 외할아버지는 경찰에게 그가 리사(당시 리사의 이름은 던(Dawn))와 데니스 보댕(Denise Beaudin, 리사의 엄마)을 마지막으로 본 것은 1981년 가을이라고 하였다. 당시 데니스 보댕은 남자 친구였던 밥 에반스(Bob Evans)와 함께 있었다고 했는데 그 이후로 그녀와 그녀의 딸을 다시는 보지 못했다고 한다. 뉴햄프셔 경찰은 외할아버지에게 혹시 이 사람을 아느냐며 고든 젠슨(래리 벤터)의 사진을 보여주었고 할아버지는 바로 그가 밥 에반스라고 하였다.
가족들이 데니스 보댕과 그의 딸이 사라졌을 때 왜 실종 신고를 하지 않았는지에 대해 직접 이야기를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아마도 그녀가 남자 친구와 그저 멀리 떠나버렸다고 생각했던 것이 아닐까? 전은순 씨 사건을 떠올려 보면 범인은 일부러 피해자와 가족들을 소원하게 만들었다. 데니스 보댕도 가족을 떠나기 직전 가족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한다.
아무튼 경찰은 혹시 드럼통에서 발견된 성인 여성이 바로 데니스 보댕이 아닌가 싶어서 DNA 검사를 해보았다. 하지만 곧 그녀가 아닌 것이 밝혀졌다. 이번에는 밥 에반스(고든 젠슨, 래리 벤터)와 시신들의 DNA를 비교해 보았다. 그러자 놀랍게도 다른 세 명과 혈연관계가 없었던 중간 나이의 여자 아이가 바로 밥 에반스의 친딸인 것이 확인되었다. 결국 이로써 이 끔찍한 살인 사건의 범인을 밝혀낼 수 있었다.
경찰은 조사를 통해 밥 에반스가 1970년대 말부터 뉴햄프셔의 맨체스터에 살면서 전기 기술자로 일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드럼통이 버려졌던 장소는 그가 일했던 회사 사장이 소유하고 있던 사유지로 그가 충분히 알고 있을 만한 곳이었다. 하지만 경찰이 범인을 확정한 2017년까지도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가 몇 가지 있었다.
첫 번째는 범인의 실제 이름이었다. 밥 에반스, 래리 밴터, 고든 젠슨, 마요 킴벌 등 수많은 이름으로 불린 이 범인은 죽을 때까지도 자기의 실제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하지만 이 또한 유전가 가계도를 이용하여 이 범인의 실제 이름은 테리 라스뮤센(Terry Rasmussen)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는 1943년에 태어나 1969년에 결혼을 하여 네 명의 자식을 두었다고 한다. 하지만 1973~1974년 경 이혼을 한 후 가족을 떠나 버렸다고 한다.
두 번째는 드럼통에서 발견된 피해자들의 신분이었다. 경찰의 수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피해자들의 신분을 알 수 없었다. 물론 경찰은 유전자 가계도 방식을 이용하여 신분을 찾고자 하였지만 시신이 너무 오래되어 DNA를 확보하기가 어려웠다.
한편 이 사건에 관심이 있던 한 아마추어가 혹시 피해자들의 가족 누군가가 헤어진 가족을 찾는 게시판에 올리지 않았을까 생각을 하게 된다. 그래서 게시판에 올려진 수많은 글들을 읽고 분석한 끝에 1999년 이복 누나를 찾는다는 글을 하나 발견하게 되었다. 그녀는 게시판에 글을 쓴 사람을 찾아 연락을 했고 글쓴이는 본인의 엄마가 라스뮤센이라는 성을 가진 사람과 결혼을 했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와 비슷한 시기에 유전자 가계도도 완성되어 2019년 성인 여성, 큰 여자 아이와 작은 여자 아이의 신원이 확인되었다.
피해자들의 가족은 1978년 추수감사절에 캘리포니아에서 그들을 마지막으로 보았다고 했다. 당시 피해자들은 테리 라스뮤센과 함께 있었으며 다른 사건들과 마찬가지로 가족 간 다툼 이후 다시는 그들을 보지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여전히 테리 라스뮤센의 친딸인 중간 아이의 신원은 밝혀지지 않았다. 정황상 아이의 엄마도 살해당했을 가능성이 크지만 현재로서는 유전자 가계도를 통해 친척들을 찾아내는 방법밖에는 답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세 번째는 리사의 엄마인 데니스 보댕은 어디에 있느냐는 것이다. 데니스 보댕도 범인에게 살해당했을 것으로 생각되나 현재로서는 그녀의 시신을 찾을 방법이 없어 보인다.
지금까지 밝혀진 상황들만 보더라도 테리 라스뮤센은 정말 흉악한 살인범이다. 그의 범행 방식도 무척이나 잔인하다. 여자 아이 하나만 데리고 다니면서 혼자 아이를 키우는 아빠 행세를 하여 혼자 아이를 키우는 엄마들을 유혹한 후 나중에 어린아이 하나만 두고 모두 살해하지 않았을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는 듯하다. 실제로 리사의 예전 수사 기록에 따르면 당시 리사가 인터뷰에서 다른 형제나 자매들은 독버섯을 먹어서 죽었다고 한다. 이런 것을 보면 그가 몇 번이나 비슷한 방식으로 성인 여자와 어린아이를 살해했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