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보잘것없는 유도 이야기 1
1996년 애틀란타 올림픽에서는 한국 유도가 매우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전기영, 조민선 선수가 금메달을 획득하였고 그 외에도 은메달 4개, 동메달 2개나 획득했으니 이 정도면 한국 유도의 최전성기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러고 보면 여자 유도에서 금메달은 물론이거니와 메달이 나왔던 게 언제가 마지막인가 싶다.
당시 중학교 2학년이었던 나는 올림픽이 끝난 후 무엇인가에 홀린 듯 동네 주변에 유도 도장이 어디 있나 찾기 시작했다. 인터넷이 있을 때도 아니었기 때문에 전화 번호부를 뒤진 끝에 걸어서 30~40분 거리에 있는 유도장을 발견할 수 있었다. 마침 내가 다니던 독서실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기 때문에 공부하다 말고 유도장 근처까지 찾아가서 사전답사도 마쳤다.
사실 나는 무엇이든 진득하게 오래 하는 성격이 못 되었기 때문에 집에서는 내가 유도를 한다는 것에 반대를 하였다. 부모님은 분명 도복만 사놓고 금방 때려치울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을 하셨다. 뭐 완전 틀린 생각은 아니셨는데 일 년 전쯤 드라마 '모래시계'의 인기로 전국에서 검도의 인기가 높아졌을 때 학교 클럽활동으로 검도를 시작했다가 도복만 사고는 곧 그만둔 전력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못하게 하면 할수록 더 하고 싶은 것이 사춘기 청소년의 마음이기 때문에 결국 부모님 몰래 도장에 찾아가 등록을 하고 말았다. 도장은 한 달에 5만 원 정도였고 도복은 2만 5천 원 정도 했는데 무슨 돈으로 혼자 도장에 찾아가서 등록을 하고 도복을 샀는지는 모르겠다. 아마도 용돈을 모으고, 책을 산다는 핑계로 조금씩 돈을 모았을 것이다.
방과 후에는 이것저것 하는 것들이 많았기 때문에 처음에는 새벽 6시에 도장에 가서 운동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6시에 도장에 도착하려면 집을 5시 30분에 나와서 버스를 타고 도장에 가야 했다. 일반적인 중학생이라면 그 새벽부터 집을 나갈 일은 없기 때문에 집에는 학교에서 영어 특별 활동이 있다고 거짓말을 하였다.
내가 처음 도장에 나가게 된 것이 10월 경이니 가을이 점점 깊어질 때였다. 그래서 새벽 5시 반의 길거리는 깜깜하고 쌀쌀했다. 그 시간에 집 밖에 나가 본 적이 없으니 새벽에는 도로나 길이 그렇게 한가한지 처음 알았다. 길에는 청소를 하시는 환경미화원분들과 아침 일찍 출근을 하는 사람들이 조금 보였을 뿐이다.
도장에도 새벽반에는 당연히 사람이 별로 없었다. 많아야 3~4명 정도가 있을 뿐이었다. 그중에서도 40대 아저씨 한 분이 열심히 나오셨는데 나에게 왜 아침에 운동을 나오냐고 물으며 본인은 이 시간밖에 운동할 시간이 없기 때문에 나온다고 하셨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시간이 지나고 아이들이 생기고 보니 그 아저씨의 마음이 이해가 되고도 남는다.
날씨가 쌀쌀했으니 도복을 그렇게 자주 빨지 않아도 되었지만 그래도 2~3주에 한 번은 세탁을 해야 했다. 물론 집에서는 빨 수 없으니 독서실에 도복을 놔두었다가 세탁소에 가져가서 빨래를 맡겼다. 세탁소 아주머니도 특이했는지 이런 것은 집에서 빨지 왜 가져오냐고 물어볼 정도였다. 어쨌든 이렇게 3개월 정도 새벽에 나가서 운동을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부모님들은 어떻게 이것을 몰랐을까 싶지만 정말 공부하러 간다고 생각하셨나 보다.
하지만 결국 이런 나의 은밀한 행각도 발각되고 만다. 바로 도장에서 걸려 온 한 통의 전화 때문이었다. 내가 며칠 운동을 빠졌는지 도장에서 요즘은 왜 운동을 안 나오느냐고 집으로 전화가 왔다(물론 당시에는 핸드폰이 없던 시절이니). 그 전화를 받은 어머니는 '우리 아들은 그런데 안 다니는데요'라고 하셨다. 우리 부모님이나 관장님이나 모두 내가 아무도 몰래 도장에 다니고 있다는 것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그 이후부터는 도장에 몰래 다니지 않아도 되어서 새벽이 아니라 오후에 운동을 나가게 되었다. 그렇다고 더욱 운동을 열심히 했던 것은 아니었다. 시험이 있거나 일이 있으면 자주 빠지기도 하였고 도장에서 운동하는 것 이외에는 체력 운동이나 근력 운동을 하지도 않았다. 뭐 열심은 아니어도 그럭저럭 재미있으니 계속 다녔나 보다.
이렇게 1년 반 정도를 다니다 보니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때쯤 검은띠를 목전에 두고 있었는데 뭐 특별히 검은띠에 대한 욕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고등학교 입학과 동시에 운동을 그만두었다. 사실 당시에는 모든 학생들이 9시까지 학교에 남아 야자를 해야 했으니(지금도 그러려나 갑자기 궁금하다) 예체능계가 아니고서야 운동을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이야기였다.
그래도 그동안 도장을 다녔던 정이 있었는지 고등학교에 들어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관장님이 집으로 전화를 해서 단증과 검은띠를 받아가라고 하셨다. 그렇게 마지막으로 도장에 찾아가 단증과 검은띠를 받아 들고는 집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