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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검사 Feb 19. 2022

얻은 것은 만두귀

나의 보잘것없는 유도 이야기 9

일본에 가서 운동을 시작한 지도 몇 개월이 지났다. 문제는 늘어나지 않는 실력만큼 내 자신감도 점점 떨어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누운 기술이야 내가 워낙 경험이 없으니 그렇다고는 해도 선 기술 또한 전혀 통하지 않았다. 게다가 종종 다른 학교들과도 연습 시합을 했는데 그때마다 한계를 느낄 뿐이었다. 





우선 기억에 남는 원정 훈련은 큐슈대학 유도부의 주장이 졸업한 고등학교와의 연습 시합이다. 주장은 후쿠오카에서 약 1시간 떨어진 동네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했는데 그 학교는 후쿠오카 지역에서는 운동으로 유명한 학교였다. 일본 만화를 보면 전국 대회 출전을 꿈꾸며 운동을 하는 고등학생들 이야기가 참 많은데 이 학교가 바로 그런 만화에 등장할 만한 학교였다.


원정 훈련을 갔던 고등학교에 세워진 비석. '공격은 최선의 방어' 아니 체고도 아니고 일반 학교에 이런 비석이?


내가 있는 동안 이 고등학교와는 두 번 연습 시합을 했는데 10살 정도 어린 고등학생들에게 그야말로 마음 놓고 농락을 당했다. 한 번은 시합에서 고등학교 1~2학년은 되어 보이는 친구에게 1분 30초 만에 삼각조르기로 패했다. 아니 얼마나 실력의 차이가 났으면 연습 시합이라고는 하지만 삼각조르기를 당할 수 있다는 것인가!


누운 기술을 배우다 보니 공식처럼 반드시 따라야 하는 동작이 있었다. 예를 들어 상대가 아래에 등을 대고 눕고 내가 위에 있을 경우(이종격투기에서 '마운트 포지션'이라고 부르는 자세) 겨드랑이는 반드시 몸에 붙이고 상체는 숙여서 상대가 밑에서 공격을 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하지만 나는 얼마나 서툴렀는지 그 자세에서 그냥 손쉽게 삼각조르기를 당하고 만 것이다. 그래도 한 달 후 다시 그 고등학교와 훈련을 했을 때는 조금은 발전했는지 절반도 따고 조르기나 굳히기를 당하지 않았다. 


보통 대학교끼리 연습 시합이라면 2~3 차례의 시합을 하고는 마무리될 텐데 상대가 혈기왕성한 고등학생이어서 그런지 시합 후 6분 자유연습(자유대련, 란도리)을 10회씩 했다. 나 같은 일반인이 이 정도로 운동을 하면 정말 죽고 싶을 뿐이다. 


오는 길에 주장이 이 학교에서는 토요일 일요일 없이 매일 3시간씩 운동을 하고 방학 때에는 6시간 정도 운동을 한다고 했다. 유도부 선생님이 너무 무섭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을 수가 없다고 했다. 그리고 유도부를 그만두는 것보다 학교를 그만두는 것이 더 쉽다고 했다. 


물론 나는 '공부는 언제?'라고 물어보지 못했다. 다만 그 무섭다는 선생님이 운동이 끝날 때 학생들에게 '내일 운동은 10시부터다'라고 말했던 것이 생각났다. 내일은 일요일인데. 유도부는 교회 다니기는 힘들겠다는 생각과 함께.






그다음으로 기억나는 것은 히로시마대학과의 원정경기였다. 히로시마대학 유도부와 큐슈대학 유도부는 매년 봄 교류전을 갖는데 마침 그 해에는 히로시마로 가게 되어서 다른 동네 구경도 할 겸 즐겁게 따라나섰다. 


이 교류전은 중요한 대회(나나다이센, 앞 글 참조)를 몇 달 앞두지 않고 벌어지기 때문에 그동안 얼마나 발전했는지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나도 어느새 일본에서 6개월 정도 운동을 했기 때문에 그동안 얼마나 늘었는지 알고 싶었다. 하지만 나에 대한 실망만 커졌다.


한 번은 일반적인 유도 규칙으로 그리고 한 번은 고전유도 규칙으로 경기를 진행했는데 나는 두 번 모두 지고 말았다. 상대가 누구였는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선 기술도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고, 누운 기술에서는 이번에도 삼각조르기에 이어진 위고쳐누르기로 지고 말았다. 뭐 내가 지는 것이야 어쩌면 당연한 일이지만 스스로 위축되어 아무것도 해보지 못한 것에 실망했다. 


아마 이 무렵이었을 것이다. 도대체 아무리 해도 아무것도 되지가 않아서 연습 때 그저 방어하기에 급급했다. 공격은커녕 상대가 들어오면 거북이처럼 엎드려 피하기만 했다. 도저히 못 봐주겠는지 주장이 연습 중 소리를 질렀다.


김상! 도망 다니기만 해서는 아무것도 안돼요!!



그때 그가 소리쳤던 것이 평생 잊히지가 않는다. 뭐가 그렇게 무서워서 더 달려들지 못했을까. 어차피 누가 시켜서 하는 것도 아니고, 진다고 뭐라고 할 사람도 없는데. 나는 아마 유도라는 운동에 적합한 사람이 아닌가 보다. 



(좌)히로시마 대학과의 뒤풀이 후. 술 먹고 개가 되는 건 전 세계가 동일 / (우)일본 만화에서처럼 서로 고맙다고 인사하는 주장들






그래도 나나다이센을 앞두고 기쁜 일이 하나 있었다. 어느 날부터 운동을 하는데 양쪽 귀가 너무나 아팠다. 도대체 왜 이렇게 아픈가 싶어 거울을 보고 있는데 사람들이 나를 보더니 드디어 귀가 '찌그러졌다(つぶされた)'라고 말을 하는 것이었다. 


아니 이럴 수가! 내 귀도 드디어 만두귀가 되다니!


흔히 한국에서는 유도나 레슬링 선수들의 귀를 보고 '만두귀'라고 하는데 접촉이 많은 운동을 하다 보면 그렇게 귀 모양이 망가지게 된다. 한국에서는 취미로 유도를 하는 사람 중에서 이렇게 귀가 망가진 사람을 본 적이 있을까 싶을 정도인데 큐슈대학 유도부 사람들은 모두들 귀 모양이 엉망이었다. 처음에는 어떻게 하다가 저렇게 되었나 싶었는데 나도 1년 가까이 운동을 하다 보니 그날이 온 것이다. 


직접 '만두귀'가 되어가는 과정을 경험해 보니 이렇다. 귀에 끊임없는 마찰을 가하면 그 속에서 핏줄이 터지는지 점점 빨개지면서 부풀어 오르기 시작한다. 이때가 무척이나 아픈데 조금만 닿아도 엄청 고통스럽기 때문에 잠을 자면서 한쪽으로 누울 수 없을 정도이다. 이렇게 부어오른 상태에서 계속 마찰을 가하면 귀 모양이 점점 더 망가지게 되고, 이쯤에서 멈추면 그나마 이어폰은 꽂을 수 있는 정도가 된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부기가 점점 빠지면서 귀는 다시 딱딱해지는데 그 모양은 예전과 같지 않다.



(우) 당시 귀가 아프다고 하니 부원들이 주었던 헤드기어, (좌) 지금 현재의 귀 모습. 그나마 다른 사람들처럼 많이 망가지지는 않았다



어쩌면 이 날이 내가 운동을 하면서 가장 기뻤다고는 말할 수 없어도 가장 보람찼던 날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덕분에 나의 귀들은 이어폰을 낄 때 조금 불편하지만 내가 젊었을 때 무엇이라도 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훈장 같은 것이라 지금도 한 손으로 만지면서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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