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검사 Oct 07. 2022

이것도 몇 번 해보니 못해 먹겠네

인생의 첫 파업 이야기, 그것도 캐나다에서 5

첫 번째 시위에 참여한 이후 생각보다 빨리 두 번째 시위에 참여하게 되었다. 오타와에 다녀온 지 일주일 만에 내가 살고 있는 동네에서 피켓팅(시위)을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엘리베이터 검사원(*)이 제보를 받았는데 새로 지어진 콘도(아파트)에 누군가 우리를 대신하여 엘리베이터 검사를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곳에 우리가 짠하고 나타나서 검사를 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 주된 임무라고 했다. 

(*) 우리 회사의 검사원은 보일러/압력용기 검사원, 엘리베이터 검사원, 연료(Fuel) 검사원 이렇게 세 분야로 나뉨. 내가 속한 보일러/압력용기가 아니고서는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일하는지 전혀 알지 못함


그런데 엘리베이터 검사원들은 뭔 놈의 검사를 그리 일찍도 하는지 새벽 6시에 콘도 앞으로 모여야 한다고 했다. 애 셋 키우는 입장에서 보면 아침 시간이 하루 중 가장 바쁜 시간 중 하나인데 그 시간에 나가야 한다니 참 곤란하기 그지없었다. 게다가 집에 차도 한 대밖에 없는데 와이프가 차를 사용해야 하니 정말 곤란하기 그지 그지없었다. 


하지만 처음으로 나의 홈구장에서 벌어지는 시위인 데다가 다른 사람들은 모두 오타와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에 차마 못 나간다고 할 수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시위 현장이 집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이라 자전거로 갈 수 있는 거리라는 점이었다. 지도로 검색해 보니 자전거로 20분 정도면 갈 수 있었다. 물론 차로는 5분도 안 걸리는 거리지만. 


결국 나는 새벽 5시 40분에 자전거로 어둠을 뚫으며 시위 현장으로 향했다.


그 새벽에 자전거를 타고 시위 현장에 가는 열정이란!!



이번 시위는 참가할 수 있는 사람 자체가 적었기 때문에 결국 나를 포함하여 총 4명이 모였다. 그나마 3명이 우리 회사 사람이었고 한 명은 같은 노조라서 지원을 나온 분이었다. 오랜 기간 노조에서 간부 활동을 하다가 얼마 전 은퇴하신 분인데 아무리 노조가 좋아도 그렇지 이 새벽에 오타와에서부터 오시다니 정말 놀라웠다. 어쨌든 이렇게 네 명이서 콘도로 들어가는 입구에 피켓을 들고 서서 들어오고 나오는 차들에게 전단지를 나누어 주었다. 


시위를 하는 중간에 엘리베이터 검사원 아저씨에게 당신네들은 원래 이렇게 일찍 검사를 하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오늘 하는 검사는 최초 설치 검사인데 아무리 못해도 검사하는데 5~6시간씩 걸리고, 그 이상 걸리는 경우도 많기 때문에 일찍 시작을 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검사원이 나오기 1시간 전쯤 엘리베이터 업체에서 먼저 나와 준비를 하기 때문에 우선 그들을 만나는 것이 일차적인 목표라고 했다. 엘리베이터 기술자들도 모두 (우리 노조와는 다른) 노조에 속해있기 때문에 만약 우리가 피켓을 들고 있으면 그날은 일을 하지 않고 돌아간다고 한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스캡(Scab, 배신자)가 검사를 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시위를 시작한 지 한 시간 반이 지났지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날 여기서 검사를 한다는 제보도 익명으로 받은 것이기 때문에 잘못된 제보이거나 마지막에 갑자기 검사가 취소되었을 가능성도 있었다. 만약 그렇다면 새벽부터 헛고생한 것이 되기 때문에 이 시위를 주도한 엘리베이터 검사원 아저씨가 눈에 띄게 긴장하기 시작했다. 계속 주위를 두리번두리번거렸는데 다행히도 마침 그때 엘리베이터 기술자들의 트럭이 나타났다. 


엘리베이터 업체와 이야기하는 우리 검사원



우리 검사원과 엘리베이터 기술자들은 십 분 넘게 이야기를 했다. 앞서 말했듯 그들도 모두 노조에 속해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우리의 입장을 잘 이해해 주었다. 이 날은 자기네들도 여기서 일을 하지 않고 돌아간다고 하였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우리 대신에 검사를 하고 다닌다는 사람도 나타났다. 지난번 오타와에서 시위의 대상이 되었던 컨설팅 회사에 속한 사람이었는데 뭐 그냥 서로 얼굴 붉히는 일 없이 그냥 인사를 하고 그 사람도 돌아갔다. 


온타리오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엘리베이터 검사 중 겨우 하나를 막았을 뿐이고 회사에서는 눈 하나 깜짝 안 할 일이지만 그래도 새벽부터 나와서 우리가 원하는 결과를 얻었으니 나름대로 만족스러웠다. 다른 사람들도 이렇게 시위를 해서 실제로 검사를 막은 적은 처음이라며 기뻐했다. 


하지만 몇 달 동안 기다렸던 검사가 취소되어서 머리끝까지 화가 난 콘도 관리자와 엘리베이터 업체 사장을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착잡하고 찜찜했다. 결국 노조와 회사의 갈등으로 인한 피해는 고객들이 받고 있고, 우리도 계속해서 월급을 못 받아서 고통받고 있지만, 회사는 그러든지 말든지 모든 것을 노조의 무리한 요구 탓으로만 돌리고 있으니 정말 역겨웠다.




이후에도 우리 동네에서 두 번 더 똑같은 시위를 하였다. 새벽에 나가서 피켓을 들고 서 있다가 엘리베이터 업체가 오면 돌려보내서 검사를 막았다. 노조에서 이런 식으로 시위를 진행한 것이 불과 몇 주 밖에 되지 않았지만 회사의 분노는 몰라도 고객들의 분노를 사기에는 충분했나 보다. 마지막 시위를 할 때에는 엘리베이터 업체 사장이 화가 나서 경찰까지 불렀다. 물론 경찰까지 왔지만 별다른 일은 없었다. 경찰관이 와서 보니 겨우 세 명이 피켓을 들고 서있을 뿐이니 그냥 몇 마디 하다가 돌아간 것이 전부이다. 



토론토나 오타와에 사는 검사원들은 일주일에 2~3번씩 시위 현장에 나가는 것 같지만 나는 겨우 네 번의 시위에 참가했을 뿐이다. 하지만 그 네 번의 경험을 통해 여기는 내가 있어야 할 곳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된 이유는 물론 편한 것만 쫓고 싶은 나의 이기적인 마음이 가장 컸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 말고도 도대체 이것이 뭐하는 짓인가 싶었다.


일반적인 파업의 경우 시위를 한다면 나만 당할 수는 없으니 회사에게 피해를 주려고 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일 것이다. 예를 들어 파업으로 내가 없는 사이 공장이 돌아가지 못하도록 회사 입구를 막고 대체 인력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하는 것은 옳고 그름을 떠나 충분히 납득할 만한 행동이다. 하지만 우리의 경우 대체 인력이 검사를 못하게 막는 것인데 그러면 피해는 고스란히 일반 시민들과 업체들이 받게 된다. 아무리 이런 일이 일어나도 우리 회사는 어차피 정부 기관이니 고객을 잃을 일도 없고 그저 죄송하다고 최선을 다하겠다고만 하면 된다(실제로도 그러고 있고). 


그리고 한두 번은 이런 시위가 통했지만 몇 주 반복되자 업체 스스로 자기네 기술자들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서있을 때 현장에 들어가지 않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해도 우리가 없어지면 바로 들어가라, 그렇지 않으면 3일 정직에 들어갈 것이라는 식으로 압박을 하는 것이다. 결국 어느 순간부터는 자연스럽게 제보도 줄어들어서 더 이상 이런 시위는 하지 않게 되었다. 그 덕분에 이제 더 이상 이것은 못하겠다고 생각하던 찰나에 거짓말처럼 더 이상 참가할 수 있는 시위가 없어지게 되었다. 



이 모든 것에 회의감이 들기 시작하니 나의 정신 건강을 위해서 여기서 떠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몇몇 팀 동료들과 다시 연결되어 이야기를 들어 보니 같은 팀 검사원 중 처음부터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었다. 다른 동료들이야 말라죽든지 말든지. 그리고 우리 회사에 나 말고 한국 사람이 딱 한 명 더 있는데 파업 때문에 고생하고 계시지 않을까 싶어 어떻게 어떻게 연락을 해보니 그분에게 파업은 전혀 남의 일이었다. 꽤나 충격적이었다. 


나는 다시 돌아가더라도 이런 회사와 이런 사람들과는 일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컴퓨터를 켜서 오랜만에 다시 그 폴더를 열어보았다. 폴더명 '02.Resume'를.

이전 06화 가스통은 없지만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