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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검사 Dec 31. 2022

그럼 츠네미는 어떻게

넷플릭스 퍼스트 러브

중학교 3학년 때 학원에 다니면서 일본어를 처음 배웠는데 왜 뜬금없이 일본어를 배우기 시작했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일본 애니메이션이나 방송, 하다못해 게임을 별로 좋아하는 것도 아니어서 일본어를 배운다고 딱히 써먹을 곳도 없었는데 말이다. 내가 더 어렸을 때 어머니가 동네 학원에서 일본어를 몇 개월 배운 적이 있으셨는데 그때 공부하셨던 책이 집안에 돌아다니고 있어서 배우고 싶어 졌을까? 뭐 그냥 언어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배우기 시작했다고 해두자.


아무튼 오래전에 없어져서 학원 이름도 기억이 나질 않지만 수유역에 있던 일본어 학원 초급반에 등록을 했다. 나를 포함하여 4~5명 정도가 있었는데 대부분 고등학교에서 제2외국어로 일본어를 배우는 누님들이었다. 사실 그전부터 혼자 히라가나를 외워보려고 하긴 했는데 혼자서는 그렇게 안되다가 학원에 다니니 단 며칠 만에 히라가나를 깨우칠 수 있어서 놀라웠다. 이래서 사교육이 필요한가 보다 싶었다. 그렇게 3개월 정도 고등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배웠는데 내가 입학한 고등학교의 제2외국어는 독일어였기 때문에 이때 배운 것이 별로 쓸모는 없었다.


그래도 워낙 일본어가 다른 언어에 비해서는 배우기 수월한 데다가 한 살이라도 어렸을 때 배워서 그런지 단 3개월 학원을 다녔을 뿐이지만 몇 년 후 대학에서 다시 공부를 하니 그럭저럭 할 만한 수준이 되었다. 사실 그때 일본어 말고 영어를 공부했어야 내 인생에 더 많은 도움이 되었겠지만 그래도 그 일본어를 이용해서 일본으로 교환학생을 갈 수 있었다(관련 이야기).


처음 일본에 갔을 때 내 일본어 수준은 일본어로 진행되는 전공 수업을 그럭저럭 따라갈 정도의 수준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저 수업 교재나 책을 통해서 일본어를 배웠기 때문에 실제로 사람들이 사용하는 구어체에는 익숙하지 않았다. 그래서 당시 내가 했던 일본어는 외국인이 처음 한국말을 배울 때 하는 말투와 비슷했을 것이다. '안녕하세요. 처음 만나서 반갑습니다', '대변을 싸고 싶은데 화장실은 어디에 있습니까?' 정도가 아니었을까.


그런데 어느 날 다른 교환학생들을 만났는데 한 학생이 오사카 말과 도쿄 말은 많이 다르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일본에도 사투리가 있구나!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지만 그때까지는 알지 못했다. 일본어도 지역마다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 주의를 기울여서 들어보니 도쿄 말과 오사카(칸사이) 말은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어떻게 이것을 몰랐을까 싶을 정도였지만, 그때까지 칸사이 사람들이 말을 하는 것을 제대로 들어볼 일이 없었으니 어쩔 수 없었다.


한편 내가 머물렀던 곳은 후쿠오카였는데 나는 그저 여기 말이 칸사이 지역의 말과 비슷하다고만 생각했다. 그나마 거의 집에 갈 때가 다 되어서야 칸사이 지역 사투리와는 또 다르게 하카타벤(博多弁)이라는 사투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무래도 쓰는 사람 수가 적으니 잘 익혀두었으면 나중에 레어템처럼 꺼내 쓸 수 있었을 텐데 아쉬웠다. 실제로 가끔씩 일본사람들을 만나면 겨우 몇 개 아는 하카타벤을 던져보곤 하는데 워낙 못해서 그런지 반응은 시원찮다.


이후 취직을 하고 사회생활을 하는데도 역시 일본어는 별로 쓸모가 없었다. 가끔 일본 회사와 일을 했을 때나 우연히 만난 일본 사람들에게 굳이 영어 대신 일본어로 이야기를 해보는 것이 전부였다. 이렇게 거의 쓸 일이 없으니 어느새 일본어보다는 영어가 훨씬 편해지고 말았다.

 





옛날부터 워낙 영화나 드라마를 보지 않았기 때문에 집에서 넷플릭스를 볼 수 있다고는 해도 거의 보지 않았다. 그저 아이들이 좋아하니 아이들에게 만화나 영화를 틀어주는 용도로 사용했다. 대신 나는 시간이 있으면 블로그에 글을 쓰거나 유튜브 영상을 만들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가 류현진이 토론토 블루제이스에 입단한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블루제이스 경기를 보기 시작했다. 야구 경기가 길고 지루한 경우가 많아서 주로 경기를 틀어놓고 옆에서 딴짓을 했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겠지만.


어쨌든 매일매일 야구 경기를 시청하다 보니 야구팬이 되는 것에는 두 가지의 단점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우선 경기에 이기는 날에는 나도 즐겁지만 지는 날에는 나도 우울해진다는 점이다. 차라리 경기 초반부터 큰 점수 차로 지고 있으면 중간에 꺼버리면 되니까 우울함이 덜하다. 하지만 이길 줄 알고 세 시간 넘게 지켜봤는데 마지막에 역전이라도 당하면 정신적인 충격이 매우 크다. 이제야 왜 부산의 야구팬들이 그렇게 큰 슬픔을 가지고 있는지 이해하게 되었다고 할까나.


그리고 다른 단점 하나는 바로 야구 시즌이 끝나고 찾아오는 허무함이다. 3월 말부터 10월 초까지 매일같이 야구 경기를 보다가 갑자기 시즌이 끝나 버리고 나니 이제 내년 봄까지 그 시간에 무엇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야 할지 몰라 허전했다. 그러다가 결국 생각해 낸 것이 그 시간에 운동을 하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캐나다의 겨울은 날씨도 춥고 해도 빨리 떨어지니 전체적인 운동량이 줄어들게 된다. 그래서 집안에서 운동을 하면서 넷플릭스를 보게 된 것이다.


처음부터 일부러 넷플릭스에서 일본 방송을 찾아본 것은 아니었지만 은근히 일본 애니메이션이나 드라마에 손이 갔다. 아무래도 쉬는 시간에도 영어로 된 드라마나 영화를 보기에는 '영어'가 약간 지겨웠다. 그렇다고 마음 놓고 한국 프로그램을 보기에는 왠지 모를 (공부를 하지 않고 있다는) 죄책감이 들어서 일본어로 타협한 것이 아닐까 싶다. '그래, 오랜만에 일본어 듣기나 해 보자'라고 생각하면서.


처음에는 일본 애니메이션을 한 두 개씩 보는 것으로 시작했다. 그런데 이것들이 생각보다 재미있는 것이었다. 애니메이션들은 분량도 짧은 편이라 운동할 때뿐만 아니라 빨래를 갤 때 틀어놓기에도 적당하였다. 이렇게 애니메이션을 보다 보니 중간에 일본 드라마도 한 두 편씩 보게 되었다. 일본 방송 특유의 호들갑스러운 드라마들은 정말 취향에 맞지 않아서 조금 보다가 꺼버렸지만 개중에 괜찮은 것들도 있었다(*).

애니메이션의 경우 '극주부도', '사이키 쿠스오의 재난' 등을 거쳐 오랜만에 '데스노트'까지 다시 보았다. 그리고 드라마의 경우 '아리스 인 보더랜드', '나만이 없는 거리' 등이 재미있었다. 그러고 보니 다들 만화를 원작으로 하는 드라마들이다. 결국 나는 만화가 좋은 것인가 보다.



이렇게 일본 방송들 위주로 시청하다 보니 최근 넷플릭스에서 공개된 '퍼스트 러브 하츠코이'가 추천 목록에 뜨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만화를 원작으로 하는 드라마도 아닌 데다가 로맨스물에는 별로 흥미가 없었기 때문에 넷플릭스의 끈질긴 추천에도 그것을 볼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그런데 넷플릭스에 접속하면 자동으로 트레일러가 재생되기 마련인데 그때마다 우타다 히카루의 'First Love'라는 노래가 들려서 나도 몰래 눈길이 가고 말았다.


내가 일본 음악을 많이 들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 'First Love'는 참 많이 들었다. 마침 내가 일본에 있었을 당시 우타다 히카루가 활발하게 싱글을 발매했기 때문에 그녀의 노래를 많이 들을 수 있었다. 어쨌든 처음에는 오랜만에 듣는 그 노래가 좋아서 트레일러에 눈길이 갔지만 어느새 노래 가사를 번역한 한글 자막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대충의 노래 가사는 알고 있었지만 한 번도 가사를 제대로 읽어 본 적은 없어서 중간중간 빈 구간이 있었다. 그런데 이 노래의 가장 처음 가사가 '마지막 키스는 담배 맛이 났어요(最後のキスはタバコの flavor がした)' 였을 줄이야!


담배 냄새를 무척 싫어하는 나로서는 상당히 충격적인(정확히는 밥 맛이 떨어지는) 가사였다. 생각보다 충격적인 가사 때문이었을까. 어느 순간 이 드라마를 보기 시작하고 말았다.




(아래부터 넷플릭스 드라마 '퍼스트 러브 하츠코이'의 스포일러를 대량 포함)


끝까지 드라마를 보고 나니 이 드라마는 클리셰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조차 클리셰일 정도로 뻔했다. 줄거리를 대략 요약을 해보면,


1. 현재: 첫사랑을 못 잊는 한 남자가 있다. 그 남자는 다른 여자와 결혼을 앞두고 있다. 그런데 하필이면 우연히 첫사랑이었던 여자를 다시 만나게 된다.


2. 과거: 둘은 고등학교 때 처음 만나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는데 여자는 대학에 가고 남자는 입대(일본 드라마에서 군대라니 이건 조금 특이하다고 할 수 있겠다)하게 되면서 사이가 약간 삐걱거리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대판 싸우게 되고 헤어지는 길에 여자가 교통사고를 당한다. 아! 어쩜 좋아! 여자는 하필 머리를 다쳐서 고등학교 때 기억만 사라지게 된다.


3. 현재: 둘은 다시 만나게 되었지만 여자는 자신의 과거 연인이었던 이 남자를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남자도 끝까지 여자에게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않는다. 그럼에도 여자는 남자에게 호감을 느끼지만 남자는 두 여자 사이에서 어느 쪽도 쉽게 선택할 수가 없다. 결국 남자는 결혼을 앞둔 여자에게도 이별을 고하고 첫사랑에게도 더 이상 만날 수 없다고 말하고는 해외로 떠나버린다.


4. 그 이후: 남자가 떠나며 남긴 CD에서 과거에 둘이 함께 듣던 'First Love'를 다시 듣게 된 여자에게 갑자기 과거의 모든 기억이 돌아온다. 몇 년 후 여자는 남자를 찾아 떠나고 둘은 아이슬란드에서 다시 만나 행복하게 살게 된다.


함께 'First Love'를 듣고 있는 녀석들



아니! 2022년에 만들어진 드라마에 기억상실이라니! 심하기는 하지만 여전히 먹히는 설정인가 보다. 뻔한 설정과 전개에도 중간중간 눈물을 훔치며 하루에 두 편씩 본 내가 그것을 증명한다. 또한 '응답하라' 시리즈와 비슷하게 과거에 벌어졌던 사건과 상황을 잘 묘사한 것도 이 드라마가 일본 내에서 큰 인기를 끌 수 있었던 이유일 것이다.


클리셰 덩어리인 이런 드라마는 결론마저 클리셰이어야 하니 해피엔딩으로 끝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해피엔딩 속에서도 오직 한 사람, 오직 단 한 사람만이 슬픈 결말을 맞이해야 했다. 그것은 바로 남자 주인공의 현재 여자친구였던 츠네미(恒美). 드라마에서는 남자가 떠나버린 이후 그 누구도 그녀에 대해서 신경조차 쓰지 않았지만 나는 드라마를 다 보고 나서도 왠지 한동안 마음이 쓰였다.


츠네미는 이 드라마에서 단지 여자 주인공의 기억이 돌아올 것이라는 복선을 주고 남자 주인공의 내적 갈등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인물인 듯하다. 그녀는 직업은 심리 상담사인데 군인이었던 남자 주인공이 이라크에 파병을 다녀온 이후 그녀에게 심리 상담을 받게 된다. 남자 주인공은 처음부터 자신의 심리 상담에는 별 관심이 없었지만 상담을 마치기 전 혹시 기억을 잃은 사람의 기억이 되돌아올 수도 있냐고 묻는다.


츠네미는 뇌신경은 참으로 오묘해서 확실하게 말할 수는 없으나 홍차에 적신 마들렌의 냄새를 맡고는 기억이 돌아온다는 프루스트의 소설을 언급하며 그럴 수도 있다고 말한다. 드라마 작가는 이렇게 노골적으로 밑밥을 깔았고 결국 여자 주인공은 우타다 히카루의 'First Love'를 들으며 과거의 모든 기억을 되돌릴 수 있게 된다.


한편 츠네미와 남자 주인공은 심리 상담 이후 점점 사이가 가까워지지만 첫사랑을 잊지 못하는 남자 주인공 때문에 둘은 연인은 아니지만 연인이 아닌 것도 아닌 사이가 되어버렸다. 그러다가 2011년 발생한 대지진 이후 둘은 정식으로 사귀게 되었고 결혼까지 앞두게 되었다. 하지만 첫사랑을 다시 만나게 된 남자 주인공은 방황을 하게 되고 그녀는 '북극성'과 '아름다움'을 뜻하는 자기 이름처럼 당신이 방황하더라도 자기는 항상 같은 곳을 지키고 있겠다는 말을 반복했다. 그래도 결국 남자는 그녀를 떠나버리고 만다.


그가 떠나려는 와중에도 '북극성'은 자신의 힘으로 스스로 빛을 내는 별인 것 같이 자신도 혼자서 살아갈 수 있다며 아무런 원망도 없이 그를 떠나보내는 그녀는 흡사 오른쪽 뺨을 맞으면 왼쪽 뺨을 내주는 것도 모자라 돌아가는 길에 쓰라고 차비까지 내어 줄 정도의 성인군자와도 같았다.


그렇게 남자 주인공이 떠나고 혼자 남아 울고 있는 츠네미.



물론 기억상실증, 학업 포기, 이혼 등을 겪은 여자 주인공의 운명도 기구하지만, 어찌 보면 이 츠네미의 운명 또한 참 기구했다. 남자만 믿고 도쿄에서 멀쩡히 잘 다니던 회사를 때려치우고 아는 사람이라고는 아무도 없는 삿포로까지 따라왔는데 갑자기 남자가 떠나버리다니. 이래서 남자는 믿을 만한 존재가 못 되는 듯하다.


그녀는 그가 떠난 이후 다시 도쿄로 돌아갔을까, 아니면 그녀가 그렇게 사랑하는 고향 히로시마로 돌아갔을까? 설마 삿포로에 남지는 않았겠지, 혼자 궁금해했다. 차라리 다음에는 본인이 그렇게 좋아하는 히로시마 카프(히로시마의 프로 야구팀)를 함께 좋아해 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났으면 좋겠다고, 또 혼자 생각했다. 실재하지도 않는 사람을 걱정하며 내 딸들은 저런 남자 만나면 안 될 텐데 생각하는 것을 보면 나도 나이가 들긴 들었나 보다.


어쨌든 '퍼스트 러브 하츠코이' 시즌 2가 만들어진다면 이번의 주인공은 당연히 츠네미가 되어야 할 것이다. 물론 시즌 2의 장르는 연애물이 아니라 복수물이 되어야겠고.



츠네미 역을 연기했던 카호(夏帆). 과연 그녀는 '퍼스트 러브 하츠코이' 시즌 2의 주인공이 될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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