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함께 자라는 꿈

딸의 한마디가 엄마의 내일을 바꾸리라

by 지혜여니

딸아이가 반깁스를 하게 되어 병원에 다녀오는 길, 잠시 카페에 들렀다. 오랜만에 단둘이 마신 달콤한 라테와 아이스크림은 우리에게 작은 파티였다.

“엄마랑 데이트하니까 너무 좋아!”

들뜬 딸의 말에 웃음이 났다. 전업이 된 뒤, 나의 존재가 딸에게 조금 더 특별하게 다가온 듯했다.


“엄마가 쉬니까 너랑 이런 시간 보내는 건 좋은데, 은근 달달한 간식을 자꾸 먹게 돼서 살이 찌는 것 같아 걱정이야.”

내 말에 딸은 장난스럽게 눈을 찡긋했다.

“그래도 좋아. 엄마랑 오래 이야기할 수 있으니까. 우리 둘만의 비밀 이야기 같잖아. 다이어트는 내일부터 하면 되지!”


그 웃음 속에서 대화가 이어졌다. 학교 이야기, 공부 걱정, 친구 이야기까지 다양한 이야기가 오갔다. 그러다 문득 내 고민도 흘러나왔다.

“엄마도 이제 좀 쉬었으니 다시 일해야 할 것 같아. 언제, 어떤 일을 해야 할까 고민이 되네. 그런데 내년엔 네가 초5가 되고, 오빠는 중학교에 가니까 애매하다. 공부도 어려워질 텐데, 준비도 별로 없으니 걱정이야.”


매년 새 학기가 되면 아이들은 예민해진다. 밖에서 완벽하려 애쓰다 보니 집에서는 그 긴장이 한꺼번에 터진다.

예전엔 아이의 그란 모습을 이해하지 못하고 “왜 이렇게 돌변하냐, 반항하느냐”라고 다그치곤 했다. 특별한 이유가 없어 보이는데도 갑자기 예민하게 돌변하는 아이들 때문에, 엄마인 나도 지치곤 했다.


하지만 육아서와 심리서를 읽으며 조금씩 깨달았다. 그것은 단순한 반항이 아니라 ‘불안함의 표현’이었다. 낯선 환경에 대한 두려움이 아이의 감정으로 터져 나오는 것이었다. 그 사실을 인정한 뒤로는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혼자 이겨내기 얼마나 힘들었으면, 엄마에게 이렇게 표현할까.’ 그렇게 생각하니 아이의 마음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이제는 감정 폭발을 탓하기보다, 그 감정을 건강하게 표현할 방법을 함께 찾는다. 조금씩, 그러나 분명히, 우리는 나아지고 있었다.


무엇보다 내가 일을 쉬면서 아이들의 변화는 더욱 눈에 띄게 나타났다. 이제 제법 자라서 불안도 줄었지만, 스스로 조절하는 법을 배워갔다. 집에 엄마가 있다는 안정감이 그들에게 큰 힘이 되었던 것이다. 꼭 곁에 있지 않아도 괜찮았지만, 함께 식탁에 앉아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사실이 아이들에게는 큰 위로였다.


그날, 딸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엄마가 우리를 돌보느라 시간을 보내는 게 좋아. 그래서 지금이 행복해. 근데 엄마의 꿈이 있으면 그걸 해보려 준비하는 건 좋은 일이지. 집에서 할 수 있는 일도 많잖아. 예전처럼 늦게까지 회사 다니는 건 너무 싫어.”


그 말에 나는 웃었지만, 마음 한쪽이 따뜻하게 일렁였다.

딸은 잠시 생각하다가 덧붙였다.

“엄마는 만들기나 꾸미는 걸 좋아하니까, 그런 걸 가르치는 선생님이 되면 좋을 것 같아. 아니면 책도 많이 읽으니 그걸 이용하거나 수학이나 컴퓨터처럼 집에서도 할 수 있는 일도 있잖아.”


순간, 가슴이 먹먹해졌다. 아이의 눈으로 엄마를 지켜보고 있었다. 나 자신보다도 나를 살피고 ‘엄마의 꿈’을 이렇게 구체적으로 생각해 주는 딸이라니. ‘아이의 꿈’만을 물어보던 나였다. 그런데 이제는 ‘엄마의 꿈’을 함께 이야기하는 딸과 마주하고 있었다. 언제 이렇게 자라난 걸까.


그날 이후, 나는 깨달았다.

아이를 이끌어야만 하는 존재로 여겼던 나의 시선이 달라져야 한다는 것을. 이제는 함께 배우고 성장하며, 서로에게 영향을 주는 인생의 동반자로 느껴졌다.


예비 중학생을 둔 부모들 사이에서는 “아이보다 한 발 앞서서 이끌어야 한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을수록 늘 어딘가 불편했다. 엄마가 먼저 다 알아서 방향을 잡아줘야만 하는 걸까? 40대 중반이 넘은 나조차 아직 모르는 게 많은데, 아이의 삶을 완벽히 이끌 수 있을까?


그 고민의 답을, 딸과의 대화 속에서 찾았다.

완벽한 이끌음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함께 자라나는 시간이라는 것을.


딸의 한마디가 나의 내일을 바꾸리라.

불안과 두려움 속에서도 우리는 서로를 통해 배운다.

아이를 통해 나는 다시 꿈꿀 용기를 얻었고, 아이 역시 나를 통해 안정감을 배워간다. 앞서서 이끌지는 못해도 적어도 함께 고민하고 보완하며 나아갈 것이다.


나는 오늘도 믿는다.

부모는 앞서 걷는 존재이기도 하지만, 인생이라는 길 위에서 함께 걸어가는 동반자라는 것을.

그 믿음으로, 오늘의 행복을 천천히 채워가리라.


우리의 모든 과정 속 시행착오조차 더 단단한 행복을 만들어가리라 마음먹어본다.

keyword
수, 금 연재
이전 24화과정 위에 세우는 나의 10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