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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힘

빛을 찾아가는 자리

by 지혜여니

타인의 대화를 듣는 순간, 뜻밖의 빛이 내 안으로 들어왔다.


카페에 책을 읽으러 앉았다. 따뜻한 커피 향이 천천히 식어가며 오후 한가운데에 머무는 것 같았다. 오랜만에 내 시간에 집중해서 들어가고 싶었다. 그런데 책장을 한 장 넘기려는 순간, 옆자리 두 여성의 대화가 자꾸만 귀에 와 박혔다. 처음엔 흔한 수다 정도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문장을 따라갈수록 이상하게 그들의 목소리만 또렷하게 남았다. 곧 알아차렸다. 가벼운 이야기가 아니었다. 나보다 훨씬 젊은 두 여인이 나누는 삶의 무게가 그 작은 공간 안에서 묵직하게 울리고 있었다. 정신과 상담, 가족과의 단절, 관계 속에서 남은 상처들. 글자를 눈으로 읽고 있었는데, 마음은 이미 그들의 어둠 한가운데로 빠져들고 있었다.



“요즘엔 그냥 사는 게 버거워. 가족이라는 이름 안에 있지만, 진짜 가족 같지 않은 이들과의 관계도 힘들고… 나한테 문제가 있는 걸까 싶어.”

언니라 불리는 여자가 담담히 털어놓자, 동생이라 불린 여자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럴 수 있어. 나도 그 과정을 지나왔어.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 그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한 거야. 이젠 스스로를 공격하지 말고, 다른 길을 찾아보자.” 했다.

그 말은 평범한 위로가 아니었다. 어둠 속을 직접 걸어본 사람이 할 수 있는 말이었다. 그 온기 하나로 공기가 아주 느리게 바뀌었다.



나는 그들의 목소리에 자꾸만 마음이 붙들렸다. 겪지 않아도 될 일들을 감당하고, 벼랑 끝에서 약 하나에 의지해 버텼다는 고백은 놀라웠다. 이런 이야기에 이렇게까지 집중했던 적이 있었나 싶을 만큼 감각이 그쪽으로 쏠렸다. 그런데 이들의 대화는 ‘힘들었다’에서 끝나는 게 아니었다. 그들은 자신을 다시 세우는 방법을 서로 건넸다. 책을 읽고, 기록하고, 약을 챙기고, 몸을 움직이며 내면을 다져가는 일상. 고되고 느리지만, 그들은 이미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게 너무 조용해서 오히려 더 강해 보였다.



잠시 뒤 언니가 말했다.

남들에게 맞추는 삶이 아니라, 이제는 나를 위한 삶을 살고 싶어.” 단호하고 부드러운 문장이었다.

동생은 “세상에 복수는 분노로 하는 게 아니야. 나를 잘 살아내는 것으로 하는 거야.”라고 답했다.

그 순간 나는 이게 단순히 옆자리 대화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이건 누군가의 인생을 다시 움직이게 만드는 태도와 언어였다. 그리고 그 말들은 나에게도 필요했다.



그들이 카페 문을 나갈 무렵, 언니가 말했다.

“너랑 이야기하니 마음이 좀 정리되는 느낌이야. 담배 생각도 줄었고, 다시 살아가보고 싶어.”



삶은 단번에 바뀌지 않는다. 어떤 문장, 어떤 단어, 어떤 손길은 분명 사람을 다시 살리기도 한다. 절벽에서 매달려 흔들리는 손을 단단히 잡아주는 단 한 사람. 그 한 사람의 언어가 방향을 바꾸기도 한다. 말 한마디가 얼마나 큰 힘을 가지는지, 나는 그 사실을 눈앞에서 보았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내 관계 안에서 어떤 선택을 해왔지? 나는 누군가의 어둠 앞에서 정말 충분히 머물렀나? 어려움의 순간에 타인의 마음을 받아준 적이 있었던가? 아니면 적당히 듣는 척만 하고 내 자리로 도망쳤던가. 나 또한, 나의 삶에서도 “나를 위한 선택”을 충분히 해왔는지 되묻게 되었다. 어쩌면 내가 저 대화를 놓치지 못한 이유는, 내 마음 깊은 곳에서 나 역시 내가 나로 살고 싶은 갈증이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마치 나에게 전해주는 말처럼 한마디 한마디를 가슴속에 새기는 시간들이 되었다.



카페에서는 여전히 같은 음악이 흘렀지만, 그들이 떠난 자리는 묘하게 따뜻했다. 나는 책 위에 손을 올린 채 한동안 가만히 앉아 있었다. 살면서 누구나 틈새가 벌어지고 무너질 때가 있다. 그때 “괜찮아, 그럴 수도 있어”라고 말해주는 단 한 사람이 때로는 빛이 된다. 오늘 나는 그 장면을 바로 옆에서 보았다. 아무도 아닌 둘이 서로를 살리고 있었다.



그들의 젊은 날이 어둠보다 빛으로 채워지기를, 그리고 나 역시 누군가의 어둠 앞에서 작은 빛을 건넬 수 있기를 소망했다. 엿들어서 미안하다고 속으로 말하며, 그 미안함 대신 조용히 눈을 감고 짧은 기도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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