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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뚤어질테닷

무기력한 나를 허락한 시간

by 지혜여니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10월.

한동안 이어진 비 때문인지, 연휴에 지쳐서인지, 스산한 날씨 때문인지 마음이 자꾸 가라앉았다. 마음과 몸은 한 세트인지 자연스레 몸도 아파오기 시작했다. 늘 무언가를 사부작거리던 내게 ‘멈춤’은 낯설고 어색했다. 큰 병이 생긴 것도 아닌데 온몸에 힘이 빠지고, 은근한 두통이 시작되더니 입맛도 사라졌다. 그저 가만히 누워 멍하니 아무것도 하지 않고 허송세월을 흘려보냈다.


아이들만 겨우 등교시키고 나면 다시 거실에 누웠다. 퇴사 후 1년 동안 누워 있었던 적은 없었다. 원래 집에 오래 있으면 답답해하는 성격임에도 이상하게 나갈 수가 없었다. 책도 눈에 들어오지 않고, 성경 읽기나 묵상도 멈췄다.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은 나날이었다.


“정말 삐뚤어질테닷.”


해야 할 일들이 다가와도 그냥 무시했다. 모든 에너지가 다 사라진 기분이었다. 사춘기도 아닌데 왜 이런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부지런히 움직이던 나’는 갑자기 사라지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또 다른 나’가 내 시간을 채웠다.


그냥 멍하니 있는 것도 어색해 넷플릭스를 켰다. 드라마를 잘 보지 않던 나였기에 한참을 둘러봐도 끌리는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냥 채널을 돌리고 또 돌리며 나오는 대로 보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폭군의 셰프>, <신사장 프로젝트>, <태풍상사>, <착한 여자 부세미>… 사람들이 재미나다 하던 드라마들을 하나씩 눌러봤다. 처음엔 관심 없다가도 보다 보니 어느새 그 안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아무것도 안 하고 시간을 허비하는 느낌이 불편해질 즈음, ‘몸도 안 좋으니 그냥 쉬자’ 마음을 내려놓았다. 그러자 한결 편해졌다. 하루, 이틀, 사흘이 지나도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아이들 밥만 챙기고 다시 이불속으로 들어갔다.


나의 답답함을 토로하니 지인이 말했다.

“그럴 땐 그냥 아무것도 하지 말고 쉬어야 해. 그게 필요한 때인 거야.”

그래, 이번엔 그런 시간이구나! 세상 무기력한 나를 만나고 마주한 시간.


‘뭐 어때. 나라고 늘 성실하고 씩씩할 필요는 없잖아. 때론 아무것도 안 하고 싶을 수도 있지.

있는 그대로 인정하니 그제야 마음이 조금씩 풀렸다. 삐뚤어지고 싶은 내 모습도 결국 ‘나’의 일부이니까, 잠깐 동안 그대로의 나를 받아주자 싶었다.


그러다 친구의 추천으로 <은중과 상연>을 보게 됐다. 그 드라마 속 장면들이 내 어린 시절을 자꾸 건드렸다. ‘그래, 그땐 저랬지.’ 잊었다고 생각했던 감정들이 되살아났고, 드라마를 보며 오랜만에 펑펑 울었다. 울다 지쳐서 다시 누웠다. 이상하게 점점 막혀 있던 무언가가 뚫리는 기분이었다. 드라마 속 이야기들에 기대어 잠시 현실을 잊었다. 어쩌면 그 시간이 나에게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소진된 에너지를 다시 채우기 위한, 나만의 충전 시간.


며칠이 지나자 약을 먹고 푹 쉬었더니 몸이 조금씩 회복되었다. 입맛이 돌아오고, 다시 움직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 5년간 책을 안 읽은 적이 없었는데, 이번엔 오랜 시간 책을 펼치지도 않았다. 자연스레 글쓰기도 멈췄다. 그러나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시간은 잘도 흘러갔다.





어느새 10월의 마지막 날이 다가왔다. 창밖으로 화창한 햇살이 들어왔다. ‘그래, 오늘은 나가보자.’

오랜만에 맞은 바깥공기는 낯설 만큼 상쾌했다. 따뜻한 햇살, 맑은 하늘, 선선한 바람이 내게 말을 건넸다.

‘이젠 다시 회복해도 되겠지?’

그저 흘려보낸 시간 같지만, 비워진 덕분에 다시 움직일 힘을 얻었다.



이제 다시 약속을 잡고, 친구를 만나고, 책을 펼친다. 글도 천천히 써본다. 조금씩 걷고, 조금씩 마음을 다잡는다. 한 달가량 쉰 만큼, 다시 나아가기로 한다.



아직 완전하지 않다. 어쩌면 또다시 무기력의 파도가 밀려올지도 모른다. 그래도 괜찮다. 그때도 이렇게, 나를 허락하며 버티면 되니까.



가끔은 멈춰 서도, 가끔은 삐뚤어져도 괜찮다. 그 시간들 사이에서 나는 여전히 나로 살아가고 있으니까.




10월의 끝에서 나는 다시 숨을 고른다. 그리고 조용히 다짐해 본다. 11월의 나는 조금 다르길, 조금 더 단단하고, 조금 더 따뜻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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