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스라이팅'이라는 말, 미국의 심리치료사 로빈 스턴이 영화 '가스등'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표현입니다.
이 영화에서 남자 주인공은 집 안 가스등을 어둡게 한 뒤, 방이 어두워졌다고 하는 부인에게 '그렇지 않은데 왜 그러냐'는 식으로 스스로를 의심을 하게 만들고 결국 아내가 판단력을 잃게 해 남편에게 의존하는 존재로 만듭니다.
"네가 문제"라는 메시지를 반복적으로 주입 시켜서 둘의 관계를 '갑-을 '관계로 바꿔 통제를 하는 겁니다.
2021.05.05. SBS 뉴스 <"너 생각해서 그래"…피해자도 모르는 가스라이팅> 中
[Ep1. 가스라이팅 H상무가 돌아온다고?]
"들으셨어요? H상무 복귀한다는 소문이 돈대요"
마치 육아휴직했던 사람 얘기인 듯, 아무렇지 않게소소한 가십처럼 이 말이 돈다는 것에 나는 경악했다. H상무는 작년 상반기 동안 마케팅본부장으로 재직하면서, 20년 가까이 이 회사에서 일해온 능력 있는 베테랑 팀장과 팀원들을 퇴사하게 만든 악질 상사로, 블라인드에서도 악명 높아 인사팀이 예의 주시하는 사람이었다. 결국 한 직원분이 그로 인해 유산까지 하게 되면서 그의 심리적 폭력성은 도저히 묵과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고, 결국 임원 계약기간 중간에 면직되며 이곳을 떠났다. (회사는 그의 남은 계약기간 동안 월급을 주고 있다. 이것도 놀랄 노자 중 하나다)
그런 그가 이곳에 돌아온다니. 그 말 자체로도 있을 수 없는 말임에도 불구하고, 그를 따르는 상무와 부장이 그가 그렇게 얘기했다며 소문을 돌게 했고, 그 소문을 대부분의 직원들이 '이 회사라면 언젠가 다시 오게 할 것 같다'라며 암묵적 사실인 듯 받아들였다. H상무는 눈에 보이지 않는 심리적 폭력, 가스라이팅을 일삼았는데 그의 드센 언어폭력에 가려져 이를 눈치채는 사람은 몇 없었다. 그래서일까. 모두가 가벼운 가십처럼 얘기했지만, 나는 가스라이팅의 심리적 폭력성이 얼마나 위험한지 가까이에서 느낀 한 사람으로서 이러한 소문을 간과하기 힘들었다.
지금도 생각나는, H상무가 가스라이팅을 일삼는 모습들 몇 가지는 다음과 같았고, 조직은 무기력과 우울감에 빠져들어감을 느낄 수 있었다.
- 마케팅본부장이 된 직후 근 한 달간 매일같이 사무실 한가운데 있는 본인의 자리로 팀장들을 불러 앉히곤, 모든 사람들이 다 듣도록 '팀장인데 이것밖에 안 되느냐', '무능하다'등의 말들로 마구잡이로 깎아내렸다(실제로는 듣기에도 민망할 정도의 심한 모욕적인 언사가 많았다)
- '팀장이 무능하므로' 팀장을 건너뛰고 팀원들 개개인을 불러 업무를 지시했다
- 이런 갑질에 질려 퇴사한 베테랑 팀장들의 자리는 본인 말에 복종하는 사람들로 채워나가며 '내 사람은 챙긴다'는 이미지로 그럴싸하게 포장했다
- A가 진행하던 일을 갑자기 같은 팀원 B에게 하라며 지시한다. 그러고는 A에게 부러 "B가 하니까 일이 착착 진행된다" 말하며, B를 이용해 A가 본인의 말을 잘 따르도록 만들었다
- 본인에게 숙이지 않는 직원은 '일을 못하는 무능한 사람'으로 매도했고, 중요 업무에서 배제시키며 기회를 박탈해버리고 무력하게 만들었다
- 반면, 본인에게 숙이는 직원에게는 '일 잘하는 유능한 사람'으로 모두가 듣게끔 큰 소리로 치켜올렸고, 주요 업무를 맡기며 임원/대표에게 눈도장 찍힐 수 있도록 만들었다
- 업무 능력이 떨어지지만 본인에게 숙이는 직원은 모두가 있는 회의체에서 놀림거리로 만드는 등 인격모독을 서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직 내 영향력을 발휘하며 승진과 인사이동에 힘써준다는 이유로, 몇몇 남직원들은 그에게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다
[Ep2. 사이좋은 팀원, 그 이면의 가스라이팅]
내가 이곳에 왔을 당시, Y차장 그녀는 광고 파트 선임으로 대리/주임급 후임 3명과 함께 일을 하고 있었고, 그중에 광고대행사에 다니다 나보다 두 달 먼저 이곳에 온 남자 대리를 늘 쥐 잡듯이 큰 소리로 혼을 냈다. 거의 3미터는 떨어져 있는 내 자리까지도 다 들리도록 Y차장은 너무하다 싶게 사람을 잡아댔고, 그와 더불어 빅마우스인 그녀가 낸 소문에 그 남자 대리는 '일 못하는' 사람으로 낙인찍힌 상태였다. 결국 그 대리는 이곳에 이직한 지 8개월도 안 되었을 때, '내가 광고에 맞지 않는 것 같다'며 4년 간 쌓은 본인의 커리어를 접어버렸다. 그리고 얼마 후 내가 들은 얘기.
"Y차장 광고 맡은 지 얼마 안 됐어. 한 1~2년?"
광고는 경험을 무시할 수 없는 전문 업종이다. 에이전시, 대행사가 있는 분야는 대개 전문업종으로 생각하면 되는데, 인하우스에서는 이런 에이전시 출신을 채용함으로써 전문성 있는 커뮤니케이션을 갖추고, 아웃풋의 퀄리티를 높이고자 한다. 근데, 전혀 아는 게 없는 광고 분야를 맡고는, 그녀보다 최소 3년은 더 경험이 많은 대행사 출신 대리들에게 단지 직급이 높다는 이유로 아는 체를 하며 깔아뭉갰고, 정작 일은 그 대리들이 다 하는 이상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를 묵인하는 상무와 팀장들은 대리들의 울타리가 되어주지 못했고 되려 그녀의 농간에 놀아나는 꼴이었다.
게다가 광고 파트 외에 다른 팀원들이 모두 있는 팀톡방에서 누군가 한 명을 찍어 험담을 하게 주도하고, 그 험담이 본인만의 의견이 아니라는 것을 피력하는 데 사용해 공론화했으며, 공식적으로 '업무를 진행함에 문제가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버렸다. 이를 보며, 그녀에게 찍힌다는 걸 두려워한 대리 이하 팀원들은 그녀에게 맞춰주기 시작했고, 그녀는 본인이 빅마우스로 다져둔 인맥을 무기 삼아 '걔는 내가 없으면 일 못해'라며 밖으로는 후임들을 깎아내리는 한편, 안으로는 '내가 다 너 생각해서 이렇게 하는 거야'라며 위해주는 척하는 전형적인 가스라이팅을 일삼았다. 이제 그녀는 대부분의 업무를 후임에게 넘기는 것뿐만 아니라, 법적으로 문제가 될 수 있는 껄끄러운 사안들에 대해 본인이 쓸 결재문을 대신 올리게 하는 등 선을 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Y차장의 악질적인 모습은 팀 내에서 가까이 지켜본 팀원들 외에는 알 길이 없었기에 회사 내 그녀의 입지는 되려 공고히 다져지고 있는 모습이다.
아직 우리 사회, 특히 직장에서 가스라이팅이라는 심리적 폭력의 위험성을 인지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은 듯하다. 본인이 피해자임을 깨닫지 못하고, '내 탓이다'라고 세뇌당한 채 지내는 사람들도 있다. 나는 이러한 가스라이팅의 실상을 이곳에서 접했고, 그 모습은 참담하기 그지없었다.
가해자는 회사에서 직급이 높은 축에 속하며, 빅마우스로 사내 영향력을 키운 편이고, 기가 세고 아랫사람을 괴롭혀 어떻게든 결과를 뽑아냄으로써 인정받는 분위기였다. 반면, 피해자는 대부분 가해자가 낸 소문에 의해 무능한 사람으로 낙인찍히거나, 무력하게 지내는 모습였다. 그리고 주위 직원들은 대부분 본인이 피해자가 되지 않기 위해 가해자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쪽을 택했고, 그 과정을 겪으며 조직은 깊은 무력감과 우울감에 빠져들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언어로 교묘하게 심리를 이용하다 보니, 본인이 겪는 마음을 누군가에게 털어놓을 수 없다는 점에서, 표면적으로 드러나지 않기에 가스라이팅은 더욱 위험하다. 반복적이고 장기적인 심리 통제 하에서 누구나 그 피해자가 될 수 있다. 때문에 지나치지 않고 주위에서 계속 관심을 보이는 동료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또한, 결과물'만'이 아닌 '과정에도' 귀 기울임으로써 모두가 건강하게 일할 수 있는 조직문화가 강조되어야 한다.
사회생활을 겪으면 겪을수록 내가 믿었던, 권선징악 같이 삶의 태도를 형성하는 가치들이 무색하게 느껴진다. 부하직원들을 괴롭히는 악질 상사가 승승장구하고, 올곧고 성실하게 일하며 회사가 나아가게 하는 사람은 되려 회사에게 외면당하고 악질 상사에게 밀리며 사라진다. 회사는 봉사단체도 자선사업도 아님을 알지만, 함께 일하는 공동체로서 최소한의 도덕성과 동료애가 유지되길. 어느 때보다 절실하게 바라본다.
가스라이팅, 어떻게 대처할까?
가스라이팅 개념을 정립한 로빈 스턴은 2008년 저서 《가스등 이펙트》를 통해 가스라이팅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왜곡과 진실을 구분하기 ▷상대방과의 대화가 소위 '밀당(밀고 당기기)'이라면 피하기 ▷옳고 그름 대신 '느낌'에 초점 맞추기 등이 필요하다고 제시하였다.
또 전문가들은 스스로 가스라이팅 피해자라는 사실을 자각한다면 얼마든지 가스라이팅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말한다. 우선 피해자 스스로가 자신이 가스라이팅을 당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해 보고, 그렇다는 생각이 들면 상대와 거리를 두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피해 자각과 거리두기가 이뤄진 다음에는 상황을 객관적으로 봐줄 수 있는 전문가 등 제3자나 조력자를 찾아 그 피해 사실을 알리고 도움을 받아야 한다. 또 타인에 의해 내 인생이 좌우되지 않도록 자존감을 회복하고 내 삶에 대한 뚜렷한 주인의식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