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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니따 Jun 11. 2020

가던 길을 멈추고

사건은 한 번에 터진다 1


평생 겪을 큰일을 이 해에 다 겪은 것 같다. 아홉수나 삼재라는 게 정말 존재하는 것일까. 예상하지도 못한 사건들이 많았다. 교통사고만 일 년에 세 번이라니 어이가 없어서 웃음만 나온다. 당시엔 눈앞에 닥친 일들에 웃을 여유가 없었고 이제야 남의 일처럼 이야기를 꺼내 본다.


첫 사고를 겪은 것은 달라스에서 운전을 시작한 지 일주일도 안되었을 때의 일이다. 당시 룸메이트와 학교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다가 밖에 있는 또 다른 룸메이트를 태워 함께 집으로 가기로 했다. 초반에 운전이 익숙하지 않아서 같이 이동해야 할 때 주로 친구들 차를 타고 다녔기 때문에 이날은 용기를 내어 내가 운전대를 잡아 보기로 했다. 때마침 술을 마셔서 운전할 수 없는 룸메이트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기회가 생겨 기뻤다. 그런 한편, 가는 곳마다 처음 가 보는 길이라 익숙하지 않았고 옆에 누가 있으니 잔뜩 긴장되었다. 사실 보조석에 앉은 친구는 평소에 옳고 그름을 잘 따지고 사소한 것도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는 사람이라 또 다른 면허 시험을 보는 기분이었다. 운전하는 내내 혼나는 것 같았다.


한밤중이라 긴장한 표정은 어찌 감추었다. 옆 사람도 불안감을 느낄 수 있겠다는 생각에 티 내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어두운 곳에서 좌회전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한국처럼 도로 상황이 좋지 않다. 미국의 어떤 동네는 그곳처럼 가로등이 하나도 없어 온전히 자동차의 불빛에만 의존해야 한다. 게다가 중앙선이 노란색으로 명확하게 구분되어 있지 않고 보도블록처럼 생긴 것이 턱으로 올라와 있어 깜깜한 곳에서는 잘 보이지가 않는다.


상대적으로 밝은 곳만 다니다가 낯선 구분선을 만나 나도 모르게 역주행하는 방향에 차가 진입(텍사스는 도로가 넓어서 의외로 흔히들 경험함.)했다. 순간적으로 너무 놀랐다. 옆에 있던 룸메이트도 크게 놀란 것처럼 보였다. 그녀의 소리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다행히도 차가 많이 다니는 도로는 아니었고 늦은 시간이라 그 길에는 내 차뿐이었다. 그러니 침착하게 후진하여 방향을 원래 쪽으로 잘 틀어 주기만 하면 되었다. 그런데 당황한 나머지 기어를 바꾼 후 엑셀을 확 밟아 버렸다. ‘천천히’는 입으로만 내뱉고 몸은 따라 주지 않은 것이다. 쿵 소리와 함께 차에 이상이 생겼음을 감지했다.


차가 잘못된 방향에 멈춰 섰으니 비상등부터 켜고 상태를 확인하고자 운전석에서 내렸다. 오른쪽 사이드 미러는 부러져 버렸고 오른쪽 뒷바퀴는 터져 버렸다. 후진할 때 사이드 미러로 도로 중앙에 있던 교통 표지판을 쓰러뜨리고 차를 빼다가 그것을 밟는 바람에 바퀴가 그 모양이 되었다. 상황을 보고도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 난감해하고 있는데 누군가가 불렀다. 지나가다가 내 사고를 목격하고는 가던 길을 돌아온 동네 주민이었다. 우리 모두 괜찮은지, 도움이 필요한지 물었다. 염치 불고하고 초면에 무엇부터 해야 하는지 묻기 시작했다.


일단 보험회사에 전화를 걸기로 했다. 영어도 잘 안되는데 놀란 상황에서 이 사고를 전하니 내 손과 목소리는 덜덜 떨고 있었다. 핸드폰을 손에 제대로 못 쥐고 있을 정도로 떨어서 룸메이트가 들어주었다. 무슨 정신으로 말했는지 모르겠다. 그 와중에 불행 중 다행인 것은 도와주시겠다는 분이 자전거인지 오토바이인지 바이크 가게에서 일하셔서 도구가 있었고 보조 타이어로 대신 교체해 주실 수 있다고 했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꺾여 버린 사이드 미러를 고정시켜야 하는데 가진 게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그분이 자신의 차를 몰고 덕테이프를 구해 오셨다. 테이프를 칭칭 감고 불안한 보조 타이어로 멀리 이동할 수는 없었다. 근처에 있는 학교로 돌아갔다. 꼴이 엉망이 된 내 자동차를 주차장에 세워 두고 룸메이트의 지인이 데리러 와 줘서 겨우 집으로 갔다.


추후 감사 인사를 전하고자 도와주신 분의 연락처를 받았다. 진심으로 감사했고 감동적인 일이었다. 마음이 진정되니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 보게 되었다. 내가 그였다면 가던 길을 멈출 수 있었을까. 솔직히 그러지 못했을 거라 본다. 괜히 곤란한 상황에 엮이고 싶지 않아서 마음은 불편해도 모른 척 지나갔을 것이다. 그런 마음 자체가 부끄럽게 느껴졌다. 어려움에 처한 이에게 기꺼이 도움의 손길을 뻗칠 수 있는, 넉넉한 자신이 되기를 바라는 밤이었다.


살면서 911 번호를 누를 일이 몇 번이나 있을까. 바로 경찰에 먼저 신고했었어야 했는데 경황이 없어서 집으로 돌아와서야 전화를 걸었다. 주의 소유물을 훼손한 것이므로 그에 대한 비용을 처리해야 했고 사고에 대한 벌금도 물었다. 이렇게 교통사고 처리하는 방법도 배웠다. 자동차에 보조 타이어가 장식으로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도 알았다. 철저한 룸메이트는 나와 함께 이 일을 겪고는 비상시 필요할 수 있는 것들을 차 안에 구비해 두고 만일에 있을 사고에 대비해 해결하는 방법을 순차적으로 적어 가지고 다녔다. 당황하면 몸이 생각처럼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몸소 체험했으니 얼마나 귀중한 경험인가. 사고는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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