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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니따 Jun 01. 2020

나의 고향은


<2015년 12월 9일 미국에 홀로 첫 발을 내딛던 날의 일기> 들춰 보기 1.



“늘 상상만 해 왔던 그곳에 있다. 달라스.


이상하게도 첫 느낌은 낯설지가 않았다. 공항에서부터 당분간 지낼 숙소까지의 픽업으로 편안하게 이동해서 인지 분명 낯선 풍경들임에도 걱정과 두려움 대신 긍정적인 감정이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내내 긴장하고 있다가 연락 주고받았던 분을 만나 안도한 덕분일까. 미리 준비해 온 SIM 카드로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카카오톡이 되고 엄마와 통화까지 하니 여기가 한국인지 미국인지 분간이 안된다.


(중략)”



2020년 지금의 내가 끄적여 봄.  


: 미국에서 출생했지만 다섯 살 즈음부터 한국에서 성장한 나는 고향을 고향이라 부르지 못하고 지냈다. 으레 고향이 어디냐고 묻는 사람들의 질문에 실제 태어난 ‘달라스’라고 답하기엔 그곳에 대해 아는 것도, 기억하고 있는 것도 거의 없어서 민망했으리라. 그리고 그리 말했을 때엔 예상치 못한 대답이라는 둥 상대의 반응이 불편했고 부연 설명을 해야 하는 것이 번거롭기도 해서, 가장 오랜 시간 살아온 곳을 고향이라 여기고 ‘서울’이라고 대충 둘러대곤 했다.


자라면서 태어난 곳의 지명은 꽤나 많이 들었지만, 자세한 이야기는 접할 수 없었다. 가부장적이고 대화하는 방법을 모르는 부모님 밑에서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쯤이면 우리 가족이 다시 미국에 갈 계획(아버지께서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셨기에 교환 교수로 지내시려던 것이리라 짐작함. 아빠를 아빠라 부르지 못하고 반드시 아버지라고 격식을 갖춰 드려야만 했음.)이라는 것을 전해 들은 것 외에는. 그래서 항상 머릿속으로 그려 보기만 했던 곳이 미국이었다.


계획은 계획일 뿐. 그 무렵 부모님의 이혼으로 이는 없던 일이 되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는 문득 ‘미국’이라는 단어가 떠올라서(아니 어쩌면 늘 품고 있던 단어인지도 모른다.) 엄마에게 유학을 가고 싶다고 말을 꺼내 보지만, 아버지의 어떤 지원도 없는 한부모 가정 형편에서 가당하기나 한 소리였겠는가. 언젠가는 가고 싶었지만 시간이 흘러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을 다니면서도 학자금 대출 빚에 허덕이던 나에게 그것은 꿈같은 일이었다.


그러다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공백 기간이 생겼다. 빚을 거의 다 갚아가던 시기였고, 당장 어느 길로 가겠다고 마음먹은 일도 없었고, 과거를 돌아보다 보니 시간을 거슬러 우리 가족의 탄생까지 도달해 부모님을 더 이해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이렇게 나의 달라스행은 고향으로 떠나는 여행의 첫걸음이 되었다.


지금도 달라스에 가면 신기하게도 언제나 마음이 편안하다. 어린 시절 무의식에 저장된 기억 때문일까.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느끼는 걸 보면 이래 봬도 고향은 고향인가 보다. 예전과 달라진 점이라면 부모님 없이 그곳에서 살아 보기도 했고, 또 다른 가족이라 부를 수 있는 분들도 생겼고, 일하지 않는 날에는 종종 찾아가는 마음의 안식처가 되었다. 그러니 이제는 조심스레 달라스를 고향이라 불러도 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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