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2월 9일 미국에 홀로 첫 발을 내딛던 날의 일기> 들춰 보기 2.
“공항에는 가족들이 와 주었다. 나 때문에 먼 길을 오신다는 게 살짝 부담이 되기도 했지만 감사했다. 비행기 출발 전 함께 식사하고 가볍게 포옹으로 인사했다. 처음에 사촌동생이 잘 다녀오라고 인사하며 안아 줄 때는 ‘응, 그래’ 하면서 별 느낌이 없었는데(떠나는 게 실감이 안 났던 모양), 바로 다음 할머니, 할아버지, 큰 이모, 엄마가 차례로 안아 주시는데 왜 그리 눈물이 나던지. 이제 진짜 가는구나 싶었다. 울다 웃다 인사드리고 눈물을 훔치며 뒤돌아섰다. 여권 확인하느라 줄 서는데 울음을 참느라 혼이 났다.
(중략)”
2020년 지금의 내가 끄적여 봄.
: 그날 나눴던 가족과의 인사가 슬펐던 것은 언제 돌아올지 기약 없는 여행을 떠났기 때문일 것이다. 보통의 여행이라면 ‘잘 다녀오겠다’는 말을 건네겠지만 편도 비행기 표만 끊은 나로서는 딱히 적절한 인사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서로가 애정 표현에 서툰지라 평소에 포옹 같은 건 나눠 보지 못해서 어색해하면서도 ‘이게 뭐라고 어째서 그토록 어려웠을까’하는 아쉬운 마음도 들었다. 늘 사랑받고 싶었던 내면 아이는 그게 또 서러워 울었다. 먼저 사랑하면 될 것을, 아직도 받고 싶은 마음만 가득한, 미성숙한 본인의 모습에 새삼 부끄럽다.
헤어짐이 슬프면서도 왜 떠나야만 했을까. 모순적이게도 가까워지고 싶은 가족과 거리를 두기 위함이었다. 표면적으로는 나 자신과 새로운 길을 찾고 경제적, 정신적으로 독립하여 더 건강한 삶을 살아 보겠다는 다짐이 있었다. 그리고 내면에서는 ‘가족과 같이 살면서도 늘 혼자인 것 같은 느낌에 외로웠으니 이럴 거면 차라리 아무도 없는 곳이 덜 외롭겠다’는 울부짖음이 스스로를 철저히 혼자인 세계로 내던졌다. 어쩌면 과거의 기억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괴로운 마음으로부터의 회피였는지도 모르겠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상대에게 상처만 줬던 지난날들. 일을 그만두고 상담을 받아 보다가 그 누구도 아닌 가족으로부터 이해받고 싶은 내면의 욕구가 크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이 당장 실현되기 어렵다면 나 자신부터 받아들여 보자는 의미에서 시간 여행을 하며 우리 가족의 탄생까지 거슬러 가 보았고, 이리하여 홀로서기 연습은 나의 고향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부모님의 나이가 되어 그곳을 찾으니 감회가 남달랐다. 모든 것이 낯설고 서툴렀을 청년 부부의 부모님 모습이 바로 지금의 나이기도 하겠다.
가족과 다시 마주할 수 있었던 것은 여행이 시작되고 일 년 반 정도의 시간이 흐르고 나서 항공사 입사 때였다. 두 달간의 트레이닝을 무사히 마치고 졸업식에 엄마와 동생을 초대할 수 있었다. 그전까지 한동안은 전화로만 소식을 전했다. 떨어져 있는 덕분에 갈등이 생길 일도 없고 애틋한 마음이 들어 이전처럼 다투지도 않았다. 슬프고 힘든 일이 있어도 엄마를 걱정시킬까 봐 알리지 않고 혼자 감내하며 지냈다. 그러다 얼굴을 보게 되었을 때는 어려움들이 지나가고 그것들을 조금은 덤덤하게 전할 수 있었다.
감사하게도 지금은 승무원이라는 직업 덕분에 비행기를 타고 원하는 곳에 쉽게 갈 수 있다. 일하러 한국을 오가며, 혹은 쉬는 날에 보고 싶었던 가족이나 친구들과 종종 시간을 보낼 수도 있다. 그러다 보니 언제 다시 찾을까 싶었던 곳이 더 이상 특별하지 않은 방문이 되었다. 비행기에서 동료들은 내가 오는 소식을 가족들이 알고는 있는지, 웃으며 가벼운 농담을 던진다. 실제로 꽤 자주 만나는 편이라 인천 공항에 도착했다는 나의 연락에 엄마가 당일에서야 기억하고 놀라곤 한다. 그리고 코로나 바이러스로 당분간 엄마 집에서 지내게 되면서 타인에게 배려하는 것처럼만 가족을 대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평화로울 것이라는 것을 다시금 느낀다. 이제는 너무 가깝지도 멀지도 않게 적정한 거리를 두고 서로를 존중하는 법을 알게 된 우리가 보인다. 특히 엄마와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