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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니따 Jun 03. 2020

헤아려지는 것들


<2015년 12월 9일 미국에 홀로 첫 발을 내딛던 날의 일기> 들춰 보기 3.



“비행기에서는 나의 무거운 가방을 대신 실어 주신, 뒷자리의 친절한 한국인 아저씨도 만났고 출발이 좋았다. 공간이 다른 항공사에 비해 좁은 편이었지만 내 옆자리에는 아무도 앉지 않아서 훨씬 편했다. 다섯 좌석이 쭉 붙어있는 자리에서 나는 제일 바깥쪽이었고 옆자리 분은 쾌적한 공간 확보를 위해 한 칸 옆으로 이동한 듯했다. 화장실 가는 것 때문에 불편할까 봐 바깥쪽 자리를 선택했는데 오히려 나는 한 번도 안 일어나고 옆옆자리 남성이 한 서너 번 나가는 바람에 비켜 주는 게 귀찮았다. 그래도 이렇게 오랜 시간 비행기를 탄 적이 없었는데 크게 힘들지 않았다. 전날 짐 챙기느라 못 자서 부족한 잠을 꾸벅꾸벅 졸며 채우고, 기내식도 여느 때보다 맛있게 먹고(1차 참기름까지 뿌릴 수 있는 비빔밥에, 2차 간식으로 샌드위치에, 3차 오믈렛까지), 30년 이상 근무하다 은퇴하는 동료 직원에 대한 기장의 송별 인사도 인상적으로 듣고, 오랜만에 받아보는 엄마의 편지도 읽으며 눈물 한 번 또 흘리고. 그러다 보니 어느새 달라스였다.


(중략)”



2020년 지금의 내가 끄적여 봄.

: 지금이야 익숙한 것들이지만 그때는 모든 것들이 어찌나 낯설게 느껴지던지. (본인 기억 기준) 장거리 비행이 처음이라 기내식 서비스가 여러 번이었던 것도, 미국 공항에서 입국 심사 절차를 밟는 것도, 하나하나가 다 새로웠다. 여행을 좋아했다. 비행기를 수십 차례 타 보기도 했다. 하지만 관찰력이 없는 것인지, 본인의 일이 아니라서 무관심했던 것인지, 비행기의 ‘飛’자도 모르던 사람이었다. 땅을 딛고 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을 날아다니는 것이 일상이 된다는 게 어떤 삶인지 그리지 못했다. 비행기가 나의 일터가 된 현실이 놀랍기만 하다. 사실 지금도 안다고 할 수 없지만, 이전과는 사뭇 다른 시선으로 그곳의 풍경을 바라보게 된 것은 분명하다.

이제는 승객으로 비행기에 탑승하면서도 일하는 사람의 입장을 생각하고 배려하게 된다. 부치지 않고 기내에 가지고 타는 수하물은 스스로 감당할 정도의 무게로만 챙기고, 주변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기본적인 부분을 보다 더 신경 쓰게 되었다. 서비스에 관심을 갖기보다는 기내 안전을 책임지는 승무원들의 주의를 요하는 말에 귀 기울이게 되었다. 미국 항공사에서 직원이자 손님의 입장에서 승무원과 승객이 사람 대 사람으로 만나는 모습을 볼 때 과하지 않고 편안하면서도 진심이 느껴진다. 자연스러워야 할 모습이 색다르게 보이는 것은 한국에서의 ‘손님이 왕’이라는 고객 중심 서비스가 익숙하면서도 불편했던 까닭이다.

그나저나 그렇게 긴 비행시간 동안 어떻게 화장실을 한 번도 안 가고 자리를 뜨지 않았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생각보다 긴장한 상태였나 보다. 비행기에서는 기압과 산소 농도가 지상보다 낮기 때문에 물을 충분히, 자주 섭취해 주는 것이 중요하다. 더불어 틈틈이 스트레칭도 필요한데, 좌석과 한 몸이었다니 생각만 해도 몸 곳곳이 쑤신다. 옆옆자리 승객이 아닌 그날의 자신이 이상하게 보인다.

코로나19로 많은 변화가 생겼다. 승객들이 개인 위생에 더 신경 쓰는 동시에, 창가 좌석을 선호하게 된 것 같다. 자리에서 이동할 확률이 낮고, 다른 승객과 승무원이 움직이는 복도와 멀기 때문에 그리 선택하는 것이 어떤 바이러스이든 감염 위험을 최소화할 수 있는 방법일 것이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시작일 뿐이다. 비행기가 이용할 수밖에 없는 교통수단이라면, 앞으로 기내 소독이나 마스크 착용뿐만 아니라 불편하지만 감수해야 하는 것들이 상당할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기내는 어떤 모습일지 궁금해진다. 은퇴하는 동료 직원에게 전하는 인사가 그때도 감동이었지만 이 시점에서 생각하니 가슴이 뭉클해진다. 나도 일자리를 잃지 않고 그 주인공이 될 수 있을까.

엄마의 편지는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성장기에 엄마는 사랑한다는 표현을 적극적으로 해 주지 않았다. 모녀가 셀 수 없이 많은 갈등을 겪었는데, 대신 그런 날 선 밤이 지나면 내 책상 위에는 가끔 자식을 향한 마음이 느껴지는 편지가 놓여 있곤 했다. 내가 미국으로 떠나기 전날, 엄마는 그 아픈 밤들을 떠올리며 다시 마음을 전했을 것이다. 자식으로서 다정한 말을 건네지 못하고, 내 아픔을 봐 달라며 언제나 가슴에 비수를 꽂는 말만 골라서 쏘아 대는 못된 딸이었다. 유한한 이 시간 속에서 그 시간들을 반성하고 또 헤아리지 못한 마음들에 가슴 아파한다. 미안해,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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