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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mad Mar 27. 2022

흩어진 잔상들

채식주의자(by 한강)... 그 두번 째 필터


간헐적으로 뾰족이 떠오르는 장면들이 있다. 영화 <조커>의 조커가 악당으로 대두되는 장면, 미드 <블랙 세일즈>의 문명의 부정적 요소를 드러내는 장면,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가벼움과 무거움, 영원회귀 개념이 그러한 것들이다. 정확히 이해를 못 해서 부지불식간에 되새김질을 반복하고 있는 이미지들, 영상들… 칼 융이 말하는 제2의 세계, 내 무의식의 세계가 현상을 인과율로 점착시키려는 욕구가 있는 모양이다. 신기하게도, 내면에 잠자고 있는 풀리지 않는 조각들은 표층으로 떠오르는 회수가 거듭될수록, 윤곽이 선명해 진다.




소설 <채식주의자>의 몇 가지 장면도 내겐 그랬다. 작가가 뭉툭하니 툭툭 던지는 불가해한 상황들은 온전함을 만들어가는 의미소임이 분명한 데, 인과율의 연결은 보이지 않는 것들이었다.


영혜가 브래지어를 착용하지 않아 사람들에게 경멸어린 시선을 받는 장면… 뇌리를 돌고 돌아 의미가 드러난다.  얇은 겉옷에 도드라진 가슴의 정점은 타인과는 ‘다른’ 영혜의 실존을 상징한다. <이방인>의 뫼르소와 같이 이질적인 실존이다. 사람들의 경멸은 차이를 차별로 받아들이는 세속의 눈, 타자에 대한 정신적 폭력이다.


채식주의를 고집하던 영혜가 포식자가 되어 병원에서 새를 물어 뜯어 죽인 설정은 차마 씹지 못하여, 병리학적 관점으로만 덩어리째 넘긴 장면이다. 사실 이 부분에서 책을 덮어버리고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표지도 펴 보지 않았다. 기묘한 감각과 두려움에서 그녀를 마주할 용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왜?”라는 의문부호와 함께, 새의 피가 묻어있는 그녀의 입술이 한 번씩 떠오르곤 한다. 칼 융의 무의식 영역을 접하면서, 이에 대한 단서를 잡아본다. 내가 본 영혜는 ‘개인 무의식’이 ‘의식’의 영역을 압도한 상태이다. 융 이론에서는 ‘의식’과 ‘무의식’이 서로 조화를 이뤄야 인격이 성장한다고 했으니, 일반적으로 페르소나인 ‘의식’이 ‘무의식’을 억압한다고 했으니, 억압받던 ‘무의식’이 폭발적으로 ‘의식’을 압도해 버렸으니, 정신분열의 문제가 생기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영혜가 포식자가 된 상황은 꿈에서 본 그 얼굴, ‘집단 무의식’의 발로인 듯 하다. 인간의 진화와 역사를 따라 잠재해온 ‘집단 무의식’은 결국 인간의 정체성이 먹이사슬의 최상위를 점하고 있는 포식자임을 기억하고 있을 테니 말이다.




그리고 몽고반점…


예술가인 화자는 문명이 만들어 놓은 가치체계를 벗어난 순수 미학의 눈으로 ‘날 것 그대로의 영혜’를 본다. “가지를 치지 않는 야생의 나무 같은 힘(78)”으로 느끼기도 하고,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사람, 경계에 가 있는 사람의 덤덤한 음성(86)”으로 듣기도 하고, “태고의 것, 진화 전의 것, 혹은 광합성의 흔적 같은 것을 연상(101)”하기도 하고, “식물적인 무엇(101)”으로 보기도 한다. 세속의 색채가 없는 방식으로 가감 없이 드러나는 모습들은 그녀의 기이한 행동들에 대한 단초를 준다.


그로테스크한 그의 예술 세계도 매혹적이다. 포르노그라피에 대한 약간의 거북함을 차치한다면, 강력한 색채로 빛나는 그의 미적 갈망은 시각예술의 감식안이 없는 나로서는 생경하고도 신비로운 경험이다. 미학적 흥분을 직접 경험하는 듯한 감흥이다. 하지만 ‘불륜적’ 행위 그 일, 영혜와의 그 일… 디오니소스적 도취에 흠뻑 젖어 든 정신에 배신의 돌이 던져진 듯 서늘하고 착잡한 그 일. 또 “왜?”라는 강한 의문점이 기억의 표면으로 올라온다. 화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미에 대한 그의 추구는 자신의 주체할 수 없는 본능이다. 미적 갈망 앞에서 아내도, 자식도, 인륜도 부차적 문제이다. 분명 미적 충동은 그의 성적 욕구와도 연결이 되어있다. 성적욕구가 인간의 본능임을 감안해 볼 때, 화자의 세계에서는 미와 성에 대한 갈구가 같은 원천에서 나오지 않았을까, 추측해 본다. 하지만 영혜의 입장에서는? 어떤 해석이 가능할까? 작품의 완성도에 어떤 의미소로 자리잡을 수 있을까? 즉흥적 도취… 인간사의 질서 따위 무시해 버리는 실존의 의미로 볼 수 있을까?





<채식주의자>는 실존주의적 의미로 감화가 큰 작품이다. 삶의 주체를 ‘나’로 인식하게 된 계기, 각성의 의미다. “좋은 엄마, 좋은 며느리의 도덕에 결박 당해 시들어 간 청춘, 스스로 부과한 도덕적 책무를 이고 지고 사느라 삶을 사막으로 만들어 버린 낙타 같은 날들”(<쓰기의 말들>; 15)에서 스스로를 구원하는 힘을 받았었다.


<채식주의자>로선 두 번째 글이다. 말하자면 이 잔상들은 ‘스핀오프’인 셈이다. 책을 펼 때마다, 뇌리에 떠 올릴 때마다, 달라지는 해석과 감흥들… 문학성이라 불리는 그 끝 없는 깊이에 오늘도 나는 숙연해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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