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오직 물과 먹이 뿐이다. 자신들의 양치기가 안달루시아의 맛있는 목초지를 많이 알고 있다면 양들은 언제까지나 그의 친구로 남아 있을 것이었다… 중략… 착하게도 양들은 그 대가로 양털을 제공하고, 때로는 자신들의 고기까지 내 주었다… ‘만일 어느 순간 내가 괴물로 변해서 자기들을 차례로 죽여버린다 해도, 양들은 자기 친구들이 거의 다 죽고 난 후에야,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알아차릴 거야. 그건 다 내게만 의지해 본능에 따라 사는 법을 잊어버렸기 때문이지. 내가 자기들을 먹여주니까.’”<연금술사 중에서; 25-26>
<연금술사>의 양치기 산티아고가 양을 바라보는 시각이다. 스스로를 부양 할 능력도 의지도 없는 양들은 자신의 운명을 양치기에게 맡길 수 밖에 없다. 산티아고처럼 양들을 아끼고 사랑하는 양치기라면 순풍에 나아가는 범선처럼 고즈넉한 평화를 즐길 테지만, <죄와 벌> 라스콜니코프의 꿈에 등장하는, 채찍의 세례를 받고 죽는 암말의 주인처럼, 잔악한 자가 그들을 지배한다면, 양들은 처참한 결말을 맞이 하게 될 것이다. 전자든 후자든, 운명의 주인은 양들이지만 스스로의 운명에 자신이 관여할 수 없다는 것이 주지해야 할 핵심이다.
여기,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이 사는 소록도라는 왕국이 있다. 왕국의 백성은 소외된 자, 병든 자들이며, 그들의 지배계층은 이들을 ‘보살핀다’는 미명하에 있는 소위 ‘건강인들’이다. 왕국의 권력은 중앙집중화 되어 있고, 왕국의 ‘왕’인 원장이 절대권력을 지니고 있다. 권력 분권이 되지 않는 이유는 선거제를 통한 선출이 아니라 하늘(중앙정부)이 내시는 왕이기 때문이다. 그 옛날 절대군주제와 유사한 정치구도이다. 절대권력의 사회조직에서는 권력을 가진 개인이 집단 구성원들의 삶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다. 선정을 하면, 태평성대를 이루고, 폭정을 하면, 구성원들의 삶은 피폐해진다. 소록도의 백성들은 ‘주지수’ 원장을 통해, 과거 폭정을 경험한다. 그리고… ‘조백헌’ 원장을 통해 선정을 접하게 된다.
조백헌 원장의 선정의 기저에는 타인에 대한 공감과 고귀한 인류애가 있다. 하지만 스스로가 자조적으로 표현하듯, 그가 원생들을 위해서 하는 혁신은 ‘실패’하게 된다. ‘실패’의 원인은 무엇일까?
단적으로 말하자면, 위로부터의 개혁은 시대 착오적인 본질적 한계를 갖고 있다. 소록도의 원생들은 그 옛날 절대군주제의 백성들과는 다른 본성을 지닌다. 절대군주제 하에서, 집단 구성원들은 ‘왕은 곧 하늘이 내는 존재’, ‘절대적 존재’라는 믿음을 내면화하고 순응이 곧 ‘선’인 세상에 살았다. 하지만 20세기를 살아가는 소록도의 원생들은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라는 사실을 깨우치고 있는 계몽된 자아이며, 지배자에 대한 ‘반항’과 ‘의심’에 ‘자유’라는 긍정적 가치를 부여하기도 하는 의지를 가진 존재다. 게다가 세상에서 겪은 소외와 배척의 시간들, 소록도 내부에서 마저, 건강인과 차별당하고, 자손번식의 욕구도 강제 되어야 하는 반휴머니즘 환경 속에서 그들은 회의적인 시각을 가질 수 밖에 없다. 그것은 그들의 최소한의 방어기제였기 때문이다. 순응하고자 하는 의지가 없는 이들을 대상으로 자발적 참여가 추동력이 되는 정책은 역학적으로 성공할 수가 없는 이상이다.
회의적 침묵의 관찰자 이상욱이 그토록 경계했던 ‘동상’. 잡힐 듯 말 듯, 뇌리를 맴돌던 상징이다. 이를 다스리는 자와 다스림을 받는 자로 구분하여 탐침해 본다.
동상이라 함은 물리적 질료 자체 보다는 내재된 무형의 가치를 일컫는다. 모든 사물이 인간의 인지를 거치고 나면, 각 인간의 고유한 시각에 따라 다양한 의미를 가지긴 하지만, 동상은 ‘신화’라는 점에서 결이 다른 특질을 가진다. 유발 하라리는 <사피엔스>에서 신화야 말로 인간의 두뇌가 감당할 수 있는 결속범위, 150명을 넘어선 규모, 가령 국가나 종교단체를 가능하게 하는 힘이라고 말한다. 공통된 신화는 서로 만난 적이 없는 사람끼리 국가를 지키게도, 십자군 전쟁에 참여 하게도 만든다는 것이다. 따라서 신화는 집단적 가치를 만들어 내어 구성원들을 결속시킨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집단 윤리를 구축하여 구성원들을 예속화하기도 한다.
본 작품에서 주지수가 만들어 내는 ‘동상’은 다스리는 자의 동상이다. 저 제정일치시대에 ‘신’이라는 신화를 권력자의 정당성을 위해 이용했던 것처럼, ‘동상’으로 형상된 신화가 그에게도 필요 했을 것이다. 원생들에게 천국을 주려는 시초의 목적이 개발과정에서 목적을 위한 목적, 자신의 공명심만을 위한 목적으로 바뀌었으니, 자신이 특별한 존재임을 각인시켜 혹세무민할 신화, 즉 동상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상욱은 조백헌의 ‘동상’도 경계 한다. 조백헌의 동상은 다스리는 자의 동상이 아닌, 다스림을 받는 자들의 동상이다. 인간은 현상에서 초월적 존재를 보는 본능을 지니고 있다. 초월적 존재는 태초 그리스의 여러 신 이기도 하고, 기독교의 신이기도 하다. 민족주의 시대, 국가의 ‘이상’이기도 하고, 노동력 착취의 시대, 목숨을 걸만한 ‘정의’ 이기도 하다. 구현된 형상은 다르지만 모두 다, 인간의 인고의 삶에 희망과 위안을 주는 데 있어 합목적적이라는 점을 주지할 수 있다. 조백헌이라는 존재를 동상의 형상으로 정신적으로 의지를 할 수 있다면, 피폐한 삶을 살아가는 원생들로서는 얼마나 달콤한 유혹일 것인가? 따라서 이상욱은 조백헌이 동상을 원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그의 동상을 원할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신화는 믿는 사람들을 예속시키기도 한다. 동상을 만들어 행복한 순응을 하는 것은 산티아고의 양처럼 의지없는 행복을 따르는 것과 다르지 않다. 결국, 원생들은 그의 동상을 지니고 현실을 뚫고 나가려는 의지를 상실하게 될 것이다.
조백헌의 개혁은 과연 실패일까? 가시적으로 드러난 성과만을 따진다면 실패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주어진 삶을 수동적으로 살아가는 원생들의 의식에 능동성의 포말을 한 점 일으킨 것 만으로도 그의 개혁은 의미가 있다. ‘우리들의 천국’이 아닌 객으로서 ‘당신들의 천국’을 추구하는 입장이고 보면 조백헌의 역할은 이상욱이 지적하듯 딱 그까지 인 것이다. ‘배부른 돼지’ 였던 원생들에게서 ‘배고픈 소크라테스’를 불러 일으킨 것이 그의 입지에 맞는 역할인 것이다.
원장이 아닌 주민으로 소록도에서 살아가는 그. 권력이 없어 하고자 하는 일에 동력은 없지만 원생들과 평적인 관계로, 함께 개혁을 추구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원생들이 그들의 의지로 개진해 나가는 ‘아래로부터의 개혁’이다. 그 출발점은 원생들의 정신과 의지를 속박하고 있는 한의 해소, 세상과의 화해가 되어야 할 것이다. 윤혜원과 서미연의 결혼식은 그 화해의 싹이 트고 있음을 증거한다. 결혼식의 주례로서 독백처럼 주례사를 준비하는 조백헌의 모습, 지극히 의미심장한 작품의 귀결이라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