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옛날 국어시간, 시의 메타포와 더불어 ‘지루함’의 상징 중 하나였던 소설의 ‘시점’… 이 ‘시점’이 세월의 흐름과 함께, 기이한 감각을 주기 시작한다.
보여지는 면과 가려지는 면, 시점은 이 두 요소를 잘 배합하여 읽는 이의 인지에 맺히는 심상을 다양한 형태로 분화시킨다. 보여지는 면을 매개로 가려진 면을 찾아 숨바꼭질 해 들어간다. 찾아낸 ‘해답’은 ‘나’라는 필터에 따라 다르다. ‘나’는 선천적 도식 스키마와 후천적 경험 환경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개인들 각자가 모두 다르다. 따라서 ‘나’의 필터는 독창적이고도 고유한 해답의 심상을 나에게 전달해 준다. 내가 1인칭 시점이나, 3인칭 관찰자 시점에서 쓰여진 글에 심취하는 것도 이러한 숨바꼭질에 전율을 느끼는 고유의 ‘나’ 때문이다. 가령, 윌리엄 포크너의 ‘Rose for Emily’에서 화자는 사실적인 면만을 얘기하며 에밀리의 생각이나 느낌은 밝히지 않는다. 현상으로 드러나는 기괴한 행동과 마을 사람들의 눈에 비친 성장환경 등의 사실적 묘사들을 단서로 에밀리의 내면을 비추어 보는 것은 개인의 몫이다. 시점은 밝히고자 하는 본질을 구석 구석 숨겨두고 이를 찾을 수 있는 장치만을 간헐적으로 내 보인다. 그리고… 수백여 페이지를 넘기면서도 찾아낸 단서들은 인과율에 따라 정렬되지 않는다. 가슴 속의 체증은 단서들의 무게에 무지근히 짓눌린다. 그러다, 막바지로 가는 어느 지점에 이르면, 한꺼번에 모든 단서들이 우르르 제자리를 찾아간다. 폭죽과 같은 환희가 느껴지는 순간이다. 무지근한 압력을 받던 가슴이 한꺼번에 뚫리는 순간이다. 이 희열을 위해… 나는 소설을 읽는다.
나쓰메 소세키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읽었다. 젊은 시절 국가 최고의 역량으로 20세기 초 영국 유학을 간 소세키, 서구문화의 충격에 압도된 그가 영국에서도, 일본에서도 이방인이었다는 얘기를 듣고 호기심을 느낀 작가다. 마침 일본 역사와 문화에 대한 관심이 커진 터라, 독특한 이 작품을 집어 든 것이다.
화자는 왜 고양이 일까? 전술 했듯 시점 및 화자는 소설에 다층적인 문학성을 부여한다는 관점에서 결정적인 요소이다. 독특한 설정이다. 화자를 고양이로 하여 작가가 소설 속에서 얻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여기 이 화두로 퀘스트를 시작해 보기로 한다.
인간사에 관여하지 않는 고양이는
인간이 부여한 가치에 대해 중립적이다.
잠시 태초의 선조 아담과 이브에게로 눈을 돌려보자. 신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후, 인간을 사랑하시어 에덴이라는 유토피아에 그들을 두었다. 병도 고통도 고뇌도 없는 그들은 그곳에서 행복하였다. 어느 날 이브가 뱀에게 유혹을 받아 신께서 금하신 선악과를 따먹고, 아담에게도 먹이게 된다. 신은 화가 나시어, 그들을 에덴에서 쫓아내며 아담에게는 평생 힘들게 일을 해야 먹고 살 것이며, 이브에게는 뼈를 깎는 출산의 고통이 있으리라 벌을 주신다. 기독교에서는 이것을 원죄로 칭한다. 여기까지가 새로울 것도 없는 창세기 신화이다. 그런데 인간의 원죄라는 것은 상당한 상징성을 지닌다. 원죄의 시작이야 말로 문명의 태동이다. 인간의 욕망이야 말로 문명을 이루는 필수 요소인 까닭이다. 선악과를 먹은 순간, 이들은 좋은 것과 좋지 않는 것에 가치를 부여하기 시작한다. 좋은 것을 쾌락, 좋지 않은 것을 고통이라고 본다면, 이 또한 상대적인 것이어서 타인보다 더 많은 쾌락, 타인보다 더 적은 고통을 추구하며 인간은 서로에게 갈등을 빚어낸다. 쾌락을 얻기 위한 발버둥은 점점 더 큰 불화의 씨앗을 낳게 되며 아이러니 하게도 태산 같은 고통을 양산해 낼 뿐이다. 가치부여가 인간의 모든 고통의 시작이며 한편으로는 인간의 본질이 되어버린 셈이다. 유일하게 자연과 가장 닮지 않은 존재, 이것이 가치부여의 특징에 기인한다. 소세키의 고양이는 이 가치부여에서 벗어난 자연 그 자체이다. 메이지 시대 말기의 지식인들을 탐구함에 있어, 인간의 이해 관계를 떠나, 가치 중립의 자세로 바라보는 자연의 눈인 것이다. 게다가 이 고양이에게는 이름이 없다. 주인이 이름을 붙여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라는 시구가 있다. 이름을 부르지 않았을 때는 나와는 상관없는, 즉 나의 ‘싫고 나쁜 영역에 없는 객체일 뿐이다가 이름을 부르니 이 영역으로 들어왔다는 얘기이다. ‘이름’이라는 것은 곧 의미이다. 나에게 특별한 대상이 되는 것이다. 가치가 부여되는 대상이 되는 것이다. 소세키가 고양이에게 이름을 붙여 주지 않았다는 것은 가치부여의 영역, 이해관계의 영역에 들이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옷은 인간에게 있어 매우 중요하다. 인간이 옷이냐, 옷이 인간이냐 할 정도로 중요하다. 인간의 역사는 살의 역사도 아니요, 뼈의 역사도 아니요, 피의 역사도 아이요, 옷의 역사라고 말하고 싶다. 따라서 옷을 입지 않은 인간을 보면 인간답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중략… 자연이 진공을 싫어하듯, 인간은 평등을 싫어한다는 사실이다. 평등이 싫어서 옷을 뼈와 살처럼 입고 다니는 오늘날, 옷을 벗어 던지고 본래의 모습인 벌거숭이 평등시대로 돌아가는 일은 미친 사람이나 할 짓이다. (목욕탕에서; 81-83)”
“요즘 사람들의 자의식이란, 자기와 남들 사이에 뚜렷한 이해관계가 있다는 점을 너무 잘 알고 있다는 거지. 이 자의식은 문명이 발전하면서 더욱 예민해 진다네. 따라서 결국에는 일거수일투족이 자연히 솔직해지지 못하는 거야… 중략… 이런 점에서 현대 인간들은 탐정적이지. 도둑과 같아 탐정은 남을 속여 자기에게만 득이 되는 직업이니 자연히 자의식이 강해 질 수 밖에. 도둑도 잡힐지, 들킬지 하는 걱정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으니 자연히 자의식이 강해질 수 밖에. 요즘 사람들은 자나깨나 어떻게 하면 자기에게 이득이 될지, 손해가 될지를 생각하지. 따라서 탐정이나 도둑처럼 자의식이 강해.(구샤미 선생의 문명론; 180-181)
Sarcasm(비꼬기)를 위한 우화적 캐릭터
소설의 특징은 당대 지식인들의 희화한 풍자소설이다. 3인칭 관찰자 시점의 서술로는 해학을 풀어나가기가 용이치 않다. 따라서 1인칭 관찰자의 ‘고양이’ 설정이 절묘하다. 통설이긴 하지만 애견은 사람을 주인으로 보고, 애묘는 제가 사람을 부리는 주인인줄 안다. 소세키의 고양이는 이러한 통설에 기막히게 들어맞는 캐릭터다. 고양이의 입에서 나오는 당대 지식인들에 대한 평가는 신랄하고 거침 없다.
“주인처럼 겉과 속이 다른 인간은 일기라도 써야 한다. 그렇게라도 해서 세상에 드러내지 못하는 자신의 참 모습을 어두운 방구석에서라도 드러내야 할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 고양이들에게는 움직이고, 멈추고, 앉고, 눕고, 볼일을 보는 것 전부가 일기 그 자체이다.(일기를 쓰는 구샤미 선생을 보며; 43)
“용맹한 호랑이도 동물원에 들어가면 똥을 먹는 돼지 옆에 있어야 한다. 하늘을 나는 기러기도 양계장에 들어가면 닭들과 같은 도마 위에서 목이 잘린다. 평범한 인간들과 함께 사는 이상, 나도 몸을 낮추어 보통의 고양이처럼 행동해야 한다.(258)”
“ 주인 생각으로는 고집을 부린 만큼 메이테이 선생보다 대단해 진 것이다. 세상에는 이런 뚱딴지같은 일이 종종 있다. 끝까지 고집을 부려 이긴 것 같은데, 실제로는 당사자에 대한 평가가 뚝 떨어져 버린다. 신기하게도 고집을 부린 본인은 죽을 때까지 자신은 체면을 세웠다고 믿는다. 사람들이 자신을 경멸해서 상대도 하지 않는다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는다. 행복한 사람이 아닐 수 없다. 이런 행복을 ‘돼지의 행복’이라고 부른다.(구샤미 선생이 메이테이 선생을 상대로 고집을 피워 말문을 막았을때; 54)
복잡한 인간사를 배재한
인간들에 대한 단순한 설정
에피소드마다 주어지는 인간들의 모습은 우스꽝스럽다. 인간의 모든 행동에는 얽키 설키 복잡한 다면적인 원인들이 있겠지만 고양이의 눈, 즉 자연의 눈에 비친 그것들은 무시해도 좋을 만큼 사소한 것들이다. 따라서 이 소설에 나타난 인간들의 군상은 단순하고 평면적이다. 진지한 구석이 전혀 없다. 에피소드마다 콩트를 보는 느낌이다. 20세기 초기 영어를 가르치는 일을 하고 있는 주인 구샤미 선생은 당대 최고의 지성임에 틀림이 없겠지만 더러운 콧털을 뽑는 것으로 생활비를 걱정하는 아내를 퇴치(?) 한다. 물리학 분야의 박사 과정을 밟고 있는 간게츠씨도 목매달기의 역학, 도토리의 스테빌리티, 개구리 눈의 전동작용에 대한 자외선의 영향 등의 우스꽝스러운 것들을 연구한다. 방대한 지식과 언술이 특징인 메이테이 선생은 엉터리 얘기로 사람들을 골탕먹이는 괴짜다. 기존의 전통적인 가치와 관습이 무너지고 서양문물을 받아들이던 변혁의 시절, 세상일에 관심 없고 목표의식이나 의지도 없이 게으르게 살아가는 지식인들을 얘기하기에 복잡한 인간사를 다루는 것은 쓸모 없는 허영일지도 모른다.
“웃기는 건 그런 한가한 인간들이 모이면 모두 바쁘다, 바쁘다 떠들어 댄다는 것이다. 실제로 얼굴빛도 정말 바빠 보인다. 너무 바빠서 자칫하면 죽겠다고 생각될 만큼 좀스럽게 군다… 중략… 사소한 틀에 얽매여 그렇게 빠듯하게 살라고 누가 사정이라도 했는가 말이다. 자신이 감당하지 못할 일을 만들고 힘들다, 힘들다 하는 건 스스로 불을 지피면서 덥다, 덥다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10)”
소세키의 고양이는 발칙하고 오만하다. 놀랍도록 지성적이며 통찰과 위트가 차고 넘친다. 유럽의 지성들, 심리학자, 문학가, 철학자, 수학자들에 대한 지식이 풍부하고 그들에 대한 사견이 명료하다. 헬레니즘 문화에 대해서도 조예가 깊다. “나체는 그리스 로마 시대의 유행이 르네상스 시대의 음란한 바람을 타고 퍼져나간 것이다(79)”라는 표현을 거침없이 하는 아이다. 꼬마녀석들의 짓궂은 장난에 날라오는 공을 맞고 주인의 죽을 확률을 뉴턴의 법칙으로 점쳐보는 아이다. 인간의 많은 영역 중 지성에 대해 특별한 감흥을 가진 나, 어느 새 소세키의 고양이가 나의 내면에 특별한 존재가 되어 있음을 느낀다. 나는 이 고양이를 애정한다.
구샤미 선생은 소세키 자신이 스스로 모델이 되었다. 중학교 영어교사인 점도, 위궤양으로 고생을 한 점도 닮아있다. 어쩌면 이 책을 통하여 그는 원죄처럼 지고 있는 문명 속의, 자신의 어쩔 수 없는 나약한 모습을, 냉철하고 회의적인 모습으로 바라보고 싶어했던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