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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mad Jun 13. 2020

말할 수 없는 그것...

빌러비드 (by Tony Morrison)

 

 소설의 주인공은 여행을 떠난다.
여기 '빌러비드'의 주인공 세서도 마찬가지다. 차마 '말 할 수 없는 것', '기억할 수 없는 것'을 말하고 기억하기 위한 여행을 떠난다. 멈추어 놓은 영혼의 시간을 자연의 순리대로 흐르게 하는 여정이다.

두텁한 동그라미 하나!
토니 모리슨이 소설의 글머리에 그려놓은 이미지다.
강렬하다.
궁금하다.
읽는 이의 갈급을 자아낸다.
하지만 작가가 던져주는 단서는 인색하고 불친절하다.
동그라미의 중심으로 가는 길이 고단하다.
이야기의 흐름을 세서의 마음상태가 주도 하기 때문이다.
하필 세서에게는 과거의 이야기가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단서는 외부적 상황에 따라 본인이 원치 않아도 상기할 수 밖에 없는 단편적인 기억들이다.
따라서 세서의 심장 속에 숨겨놓은 이야기들은 외부의 유의미한 상황이 발생하면 연결점을 찾아간다.
뾰족하고 날카로운 조각들, 이것을 독자가 포착해 원의 중심으로 가는 길을 직접 내야 한다.

  세서는 식민지 시대말기의 흑인이다. 그녀를 식민지시대 희생자로 끌어 들어가 영혼을 죽은 상태로 만들어 버린 과거의 그 사건은 "피부가 희기만 하면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하기위해 흑인의 인격을 모두 빼앗을 수(409p)" 있었던 상황에 대한 항거다. 흑인들 사이에 결혼이란 개념이 없었던 시절, 자식마저도 '백인들의 재산불리기'의 방편으로 '교배'를 통해 얻었던 시절, 모성이란 것은 금기였고 노예법에 위배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가슴 속에 거대한 불덩이로 지니고 있었기에, 그녀의 많은 자아 중 독보적인 정체성 자체였기에 그녀는 시대의 폭풍 속에 삼켜질 수 밖에 없었다.

 과거로 부터의 방문자 블러비드는 유령이다. 세서의 죽은 딸이다. 생전 이름을 지어주지 못하고, 목사의 습관적 표현 'beloved'를 따서 비석에 이름을 새겨 넣은 딸. 그 이름을 가지고 그녀가 현신하여 세서에게 왔다.  


이 아이...  행동을 걷잡을 수가 없다. 세서를 광적으로 사랑하는가 하면 죽이려고도 한다. 관심받기를 원하는 가하면 원망도 짙다. 끊임없이 세서를 과거로 몰고간다.

 소설 속에서 빌러비드는 실질적으로 '존재'한다. 덴버나 폴 디와 말도 하고 생활도 한다. 하지만 그녀의 비정상적인 행동은 세서가 의식 속에서 만들어 낸 딸의 형상인듯 하다. 마치 빌러비드가 세서 자신을 사랑하길 원하면 그녀를 사랑하고 자신을 원망하길 원하면 잔혹하리 만치 원망한다. 끊임없이 자신의 선택에 대해 설명하고 설명하지만 빌러비드는 받아들이지 않는 데, 이것 역시도 자신이 자신을 용서 못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마침내 자신이 스스로 옭아 맨 멍에를 벗어 날 계기가 일어나는 시점에 빌러비드가 사라지는 것을 보면 의혹은 더욱 짙어진다. 빌러비드는 세서가 자신을 용서하기 위한 퀘스트의 과정에서 스스로가 만들어 낸 망상이 아닐까?

 세서는 고집스럽고 오만하다. 몸은 노예였으나 정신은 자유롭다. 백인들에게 당하는 부당한 대우들에 늘 의문을 갖는다. 온 몸으로 불행과 맞서고 세상이 부과하는 수치(shame)도 한 마디의 변명없이 담담히 받아낸다. 과거 그 많은 슬픔을 겪고도 마치 남의 일인 듯 냉랭한 어조로 말한다. 뼈저린 과거사를 감성에 호소하지 않는다. 백인들의 잔혹성, 흑인들이 겪어야 했던 처참함을 가슴깊이 적시고서도 식민시대의 글을 읽기 시작하면서 각오했던 눈물은 흐르지 않는다. 모리슨은 말한다. "분노는 너무 시시하고 연민은 너무 질척거리는 감정입니다(458p)" 나는... 이 오만함이 좋다.

 이 작품은 간헐적으로 툭툭 던져주는 단서를 중심으로 퍼즐 맞추기를 하며 읽어야 한다. 뇌리에 떠오르는 물음표를 즐길 줄 알아야 한다. 난파선의 잔해처럼 흩어져 있는 단서들이, 패턴을 추구하는 의식 속에서 구조물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하면, 뼈 속을 시리게 올라오는 전율과 조우하게 된다. 이것은... 암울하고 무거운 가슴에 미세한 균열의 청량감을 주며, 암흑 천지의 일출이 그러하듯 지배적인 힘으로 어둠을 몰아낸다. 작품이 주는 해방감이다.


  

  미국 흑인 인권 시위가 한창이다. 과거 백인들의 식민정책으로 내면화 된 정신적 예속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흐름의 일맥이다. 상충되는 가치로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와 고통이 되는 과정들이지만, 탈식민주의 관점에서, 필히 치뤄야만 하는 아픔이다. 하지만... 대의를 향한 이 역사적 조류 속에서 또 하나의 기형적인 기류, '혐아시안' 이 포착되고 있다. 차별의 주체인 백인 뿐 아니라, 대상인 흑인들 마저도 동양인에게 노골적인 적의를 드러낸다. 흑인 인권 운동이 인간 존재 자체가 평등하고 존중 받아야 한다는 명제를 전제하고 있다는 점을 미뤄볼 때, '혐 아시안'기류는 전세계적으로 공감을 받는 인권운동의 정당성을 저해하는 모순적 행태다. 진정, 인간은 평등을 싫어하는 근원적 본질을 가진 존재인가...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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