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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mad Mar 30. 2021

'흰'의 단상들

 '흰' (by 한강)


인간의 마음 속에는 여러 각도의 눈이 있다. 인간은 단 몇 마디로 정의될 수 없는 복잡성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다양한 각도의 눈은 관점으로도, 정체성으로도 표현해도 좋다. 글을 읽을 때, 나의 내면 수 많은 관점이 글의 의미와 이 의미가 연결되는 방식에 몰두하는 것을 느낀다. 여러 관점들은 각기 공감을 하기도 하고, 거부하기도 하며, 또 아무 일 없는 듯 투과시켜 버리기도 한다. 공감과 거부는, 순방향이든 역방향이든, 작품 속의 한 요소와 나 고유의 관점 중 특정한 하나의 파장이 맞아야 형성되는 우연의 과정이다. 한 작품이 마음 속에 깊은 인상을 준다는 것은 이 우연성이 연속적으로 일어나 내면에 맺히는 심상을 키워 나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강 작가의 작품들이 나에게는 그렇다. 『흰』에서 조각 조각 던지는 그녀의 이야기는 서술이 아닌 단상들이다. 스틸 컷처럼 흩뿌려진 단상들은 인과관계가 결여 되어 있다. 가공되지 않은 날 것. 규칙적 패턴이 익숙한 보통 사람, 나 이기에 규칙성을 찾아 헤매는 과정이 꽤 고되다. 공감과 거부의 감정이 극과 극을 경험하고 시시때때로 교차되는 감정의 서지가 크다. 어느 새, 규칙성을 쫓는 행위가 허무해 진다.

  작년, 『채식주의자』가 내면에 태풍을 일으켰다. 실로 오랜만에 두근대는 가슴을 부여잡고 읽었다. 책을 읽은 여파가 한 달 이상은 갔었다. 시각에 성에가 낀 듯, 어떤 열망이 현실의 풍경을 나로부터 괴리 시켰다. 인생에서 몇 안 되는, 에너지 최고조의 모습을 그 시기에 보였으리라. 여기 이 작품 『흰』을 보고서 다시 가슴이 두 방망이질 치기 시작한다. 어떤 식으로든 많은 부분에서 나의 정체성 자체인 내 관점들과 파장이 맞는 것이다. 작가의 세계에는 나란 존재가 없겠지만 나의 세계에서 그녀는 큰 인연이다.

  흰…
작가의 흰빛은 세상을 덮어 버리는 선연한 색이 아니다. 희뿌연 빛이다. 시야만을 가리면서 그 내면에 무언가를 품고 있다. 생명을 품기도 하고, 죽음을 품기도 하고, 자유를 품기도 하고, 평등을 품기도 한다. 흰 빛 속에 영원이 엿보이는가 하면 어느 순간 찰나가 번뜩인다. 눈에 보이는 것 모두가 진실은 아니다, 흰 빛 너머에는 차마 생각지 못한 진실이 있을 수 있다.

  그 도시의 1945년 영상에서 그녀는 흰 도시를 보았다. 처음엔 눈이 쌓인 것인가 했던 것이 촬영 카메라가 고도를 낮추니 폐허가 된 돌의 잔해들이 흰 빛으로 드러난다. 그 흰 빛 위로 불에 탄 흔적이 끝없이 이어진다. 히틀러가 정권에 항거의 봉기를 일으켰던 도시를 참혹하게 파괴한 현장이다. 잔잔한 눈 빛이 가리고 있던 것은 역사의 잔인함이다.

  다수의 범인들은 타자와의 대비를 통해 자의식을 쌓아간다. 본인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스스로를 형상 지으면서… 인간의 본성, 자기 방어의 특징이다. 순간 순간 의식적으로 자아상을 냉정히 보려 하지만 지극히 주관적인 내 눈의 미러도 종종 나르시시스트를 확인한다. 그리하여, 그녀의 그 면모가 확연히 뇌리에 들어왔을 것이다.

  작가는 타자인 객체를 끌어 안는다. 타자에게 자신을 투영하지 않는다. “흰”, 작가가 말하는 “흰”은 색이라기 보다는 반투명한 막이다. 막 너머에 타자가 있으나 타자와 대비시켜 자신을 두드러지게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타자를 투과시켜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준다. 가장 깊은 심처에 있는 타자는 보편적인 인간들이 갈등의 정점으로 여기는 죽음이다. 대표적 형상으로 발현한 존재가, 태어난 지 2시간 만에 죽은 그의 혈육. 삶의 자리를 죽음에 묵묵히 내어준다.  

  그녀가 머물렀던 죽음과 생명의 도시 그 방 문, 누군가 긁어 만든 숫자 301이 그녀에게 외치는 소리, “난 아무것도 아끼지 않아. 내가 사는 곳, 매일 여닫는 문, 빌어먹을 내 삶을 아끼지 않아.” 그녀는 숫자들이 이를 악물고 자신을 쏘아봤다 하였지만 아무것도 아끼지 않는 것은 바로 그녀 자신이 아니던가?

어찌 이런 심연이 있을까, 어찌 삶과 죽음을 이렇게나 가까이 두고 살 수 있을까. 현상에 대한 직관에 늘 달콤한 죽음(채식주의자의 영혜에 대한 자의적 해석)과 삶에 대한 회의가 있다면 그 무거운 가슴을 어찌 안고 살아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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