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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mad Oct 17. 2021

부조리한 인간 한탸

너무 시끄러운 고독(by  Hrabal)&시지프 신화(by Camus)



팽팽히 불거지는 근육.
긴장감에 떨리는 손과 하박.
찌푸린 이마, 악 다문 하관, 얼굴선을 타고 내리는 굵은 땀방울.
시지프가 힘껏 바위를 굴려 올리고 있다. 목표 지점은 산 정상. 곧 고지다.
마침내. 마지막 힘을 짜내어 산 정상에 이른다. 하지만 정점에 도달하는 순간, 허무하게도 바위는 반대편 경사로 굴러 떨어진다. 그렇다. 시지프는 지금 바위를 산 위로 굴려 올리는 신의 형벌을 받고 있다. 이 형벌은 무한히 이어진다. 시지프의 이 허무한 작업은 산 아래에서 다시 시작되어야 한다.

성과 없이 무한히 이어지는 노동은 절망을 운명 짓는다. 하지만 알베르 카뮈는 다시 바위를 굴리기 위해 산을 내려오는 시간, 의식을 되찾는 시간은 시지프가 운명보다 우위에 있다고 말한다. 운명의 부조리를 발견하게 될 때, 행복도 만들어 내는 힘이 인간에게 있기 때문이다. 부조리한 인간(부조리에 맞서는) 은 그러한 운명을 초월자들이 정해 놓은 운명이 아닌, 자신의 운명으로 만들고 절망 속에서 희망을 스스로 만들어 낸다. <너무 시끄러운 고독>의 첫 장 전단에 “태양만이 흑점을 지닐 권리가 있다.(7)”고 하지 않았던가? “그림자 없는 태양은 없는 법이기에 어둠이 무엇인지도 알아야(시지프 신화; 190)” 태양의 광휘를 맛볼 수 있는 것이다.





“하늘은 전혀 인간적이지 않고 사고하는 인간 역시 마찬가지(24)”로 인간적이지 않다. “사고라는 행위 자체가 상식과 충돌하기 때문이다.(12)” 한탸가 입버릇 처럼 말하고 있는 구절이다. 사르트르의 실존보다는 카뮈의 부조리 철학에 그의 삶을 대비하는 것은 바로 이 구절 때문이다.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인간이다. 하지만 세계는 인간의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다. 여기서 인간의 욕망과 세계는 대립 상태가 되는 데, 이것을 카뮈는 부조리라 일컫는다. 부조리한 세계는 누구나 조우한다. 하지만 부조리한 세계를 살아내는 방식은 각자가 다르다. 회의론에 갇혀 자살하는 사람도 있고, 인간이 이해 못하는 영역을 신의 영역으로 돌려 회피하는 사람도 있고, 부조리를 반항의 태도로 대치하는 사람이 있다. 카뮈는 가장 후자를 ‘부조리한 인간’으로 칭한다. 부조리한 인간은 부조리한 세계 속에서 “자신에게 맞는 관념과 형상의 집(시지프 신화; 81)”을 짓고 반항을 통해 “자기자신 앞에 끊임없이 현존함(시지프 신화; 83)”을 드러내며, 세상을 살아가면서 “자신의 판단을 제외한 모든 심판을 배제(시지프 신화; 101)” 시킨다. 이를 테면, 부조리한 인간은 한탸와 같은 사람이다.

한탸는 더러운 폐지와 오물 속에서 35년간을 폐지 압축공으로 살아왔다. 부패해가는 폐지의 악취가 때때로 견딜 수 없는 그의 작업장은 늘 지하다. 35년간의 비위생적인 지하 생활은 그를 신선한 공기 조차도 견딜 수 없는 몸 상태로 만들어 놓았다. 한 때 한탸는 만챠와 사랑을 했다. 그녀에게 고백하던 가장 행복한 순간, 불의의 사고로 사랑을 잃었다. 사랑을 만회 할 단 한번의 기회가 오긴 했지만 같은 류의 사고로 영원히 사랑을 잃었다. 선물과 같이 인생으로 들어 온 일론카, 집시 소녀, 한탸의 인생에서 그녀는 분명 일생일대의 운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마이다네크 혹은 아우슈비츠의 연기 속에 홀연히 사라진다. 한탸의 하늘은 이러했다. 인간적이지 않았다. 한탸 세계의 부조리는 이러했다. 인간을 끝없이 절망의 극치로 몰고 가는 그런 종류의 부조리였다.

부조리한 인간은 어둠 속에서 희망을 찾아 낸다. 절망에 굴복하지 않고 나만의 세상을 만들어 낸다. 한탸의 이 세계는 바로 도취의 세계, 책의 세계다. 단순한 독서라 할 수 없는 이 세계에서, 그는 “근사한 문장을 통째로 쪼아 사탕처럼 빨아먹고, 작은 잔에 든 리큐어처럼 홀짝대며 음미(10)” 하기도 하며, 문장이 “천천히 스며들어 (그의) 뇌와 심장을 적실 뿐 아니라 혈관 깊숙이 모세혈관까지 비집고(10)” 들어오기도 한다. 맥주가 곁들어 지면, 사고의 흐름이 원할해 지며 텍스트의 심부로도 파고 들 수 있고, 섬망을 통해 책 속의 인물까지 만날 수 있다. 한탸의 살아가는 방식은  부조리에 대한 순응으로 자신을 매몰시키는 것이 아닌, 의식적인 ‘반항’으로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는 것이다. 이러한 반항은 스스로에게 자신의 현존을 끝없이 드러내기도 하고, 부조리한 세상에서 찰나의 희망과 행복감을 선사하기도 한다. 사랑해 마지않는 책을 압축해야 하는 부조리한 상황에서 “파괴의 기쁨과 맛(12)”을 배움으로써 부조리에 순응하기를 거부하기도 한다. 부조리에 대한 순응이 ‘슬픔’과 ‘체념’이라면, 이에 대한 거부 즉 ‘반항’은 형이상학적 기쁨이며, 희열인 것이다. 부조리한 인간은 의식하는 인간, 즉 사고하는 인간이다. 부조리의 세계를 직시하고, 반항을 하는 것은 사고가 매개가 되어야 한다. 사고하는 인간은 인간적이지 않다. 부조리의 세계를 저항하는 사고하는 인간은 세계에의 순응을 의미하는 ‘상식’의 영역에 상치되기 때문이다.





한탸의 희망은 "죽음이 유일한 현실(시지프 신화; 87)"인 희망과 미래없는 부조리한 삶 속에서 자신이 의미를 부여한 희망이다. 그의 희망 속에는 그 만의 창작품, 예술작품으로서의 폐지 꾸러미가 있고, 그의 미래에는 압축기와 함께 퇴직하여 창작활동을 계속 해 나가겠다는 목표가 있다. 하지만 절망의 삶 속에 그가 어렵게 피워낸 이 희망은 문명의 발달과 함께 다가온 새로운 부조리에 의해 파괴될 위기에 놓인다. 부브니의 초대형 압축기, 저인망 고기잡이와 같은 비인간적인 작업방식, 새 세대 압축공들의 다른 사고 방식등을 목도한 그는 폐지들을 다루는 과정에서 누렸던 자신만의 낭만이, 그 시절이 끝났음을 느낀다. 자신이 쓸모없는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새로운 압축공들 처
럼 우유를 마시고 온전한 정신을 유지하며 무심하고 비인간적인 모습으로  압축작업을 맹렬하게 해 보지만, 본인은 행복하지 않다. 역시 본질은 실존을 앞설 수 없는 것이다. 부조리에 순응하는 것은 자신의 실존에 반하는 것이다.

인쇄소의 백지를 꾸리는 일, 새로이 부여 받은 직무는 한탸의 세계를 무정히  부정한다. 잉크가 없는 백지따위 한탸의 창작활동에 전혀 소용이 없는 것이다. 한탸는 다시 부조리의 시험대에 놓이게 된다. 순응이냐, 반항이냐? 방황 속에서 만난 예지몽은 프라하시내 전체가 거대한 압축기 속에서 압축이 되어 파괴되는 것이다. 방황 속에서 만난 환상은 손목 동맥을 자른 세네카가 자신의 책 <마음의 평정에 관하여>를 입증하는 것이다.
결국 한탸의 선택은 '승천'이다. "존재와 무의 극한(130)"이다. 존재는 의지요, 무는 죽음이다. 죽음으로써 자신의 의지를 입증하는 것이다. 한챠는 자신의 '승천'이 세네카와 소크라테스의 종말과 같다고 말한다. 세네카가 죽음으로써 자신의 이론을 입증했듯, 소크라테스가 죽음을 선택하여 자신의 신념을 입증했듯, 그렇게 한탸는 자신을 소진하여 가장 아름다운 작품을 만들어 낸다.

한탸가 책과 동화를 이루는 모습은 그의 진술 속에 촘촘히 녹아 있다. 현실과 책 속 세계의 명확한 경계가 없다. 맥주를 매개로 그는 자신이 책인지 책이 인물인지 구분하지 않는다.
책속에 빠져들면 "꿈 속의 더 아름다운 세계로 떠나 진실 한복판(16)"에 가 닿고 "스스로에게 소외된 이방인(16)"이 된다.
프로이센 왕실의 책들이 전리품으로 규정되어 비를 맞으며 열차에 실려나갈 때, 눈물을 흘리며 인륜을 거스른 죄로 경찰서에 스스로 죄를 청하기도 한다. 잠이 들때면 의자에 앉아 얼굴을 무릎에 대고 수그린 자세로 잔다. 책이 접힌 것과 유사한 모습이다. 압축기에서의 마지막 순간도 주머니 칼처럼 몸이 접힌다. 이것도 책의 형상이다. 한탸는 책과 함께 폐지 꾸러미가 되는 종말을 선택한다. 의지가 택한 책의 운명이다.

폐지 꾸러미는 제지 공장에서 산과 알칼리 용액에 던져 져서 새로운 종이로 재탄생한다. 폐지 꾸러미 속에 자신을 던져 넣은 한탸도 새로운 종이가 될 것이다.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결국 한탸가 선택한 것은 '프로그레수스 아드 오리기넴(progressus ad ariginem) 근원으로의 전진'이 아니었을까?


<너무 시끄러운 고독>을 완독하고 '한탸앓이'를 했다. 그의 생이 아까워 헛헛한 마음을 겪어내야 했다. 그 시간 속에 책장 한켠에 잠들어 있던 <시지프 신화>를 채워 넣었다. 그리고 한탸의 진술과 행동이 카뮈의 철학으로 각도를 달리했다
부조리한 인간 한탸... 내가 새로이 재회한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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