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언어는 근저에 있는 정신적 본질에 대한 번역이다. 번역이라는 것은 본질을 전체로서 담보하지 못한다. 많은 특징 중 하나의 조각을 취해 전체인 듯 표현한다. 그나마도 심층적이라기 보다는 피상적인 면을 취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인간의 언어는 자체로 불완전한 표출의 단편이다.
언어의 태생적 한계는 표현 주체에게 역으로 여러 가능태를 열어 준다. 표현 주체의 선택에 따라 정신적 본질은 여러 형태를 띨 수 있는 것이다. 이를테면, <묻히지 못한 자들의 노래>에서 작가가 선택한 언어들이 그렇다. 아빠, 엄마, 기븐, 레오니, 케일라/미카엘라… 그리고 집, 일상에서 별다를 것 없는 호칭들이지만 작품에서 글이 연결되는 방식은 작가가 이 호칭들에 어떤 심연을 담았는지 보여준다.
조조에게 아빠와 엄마는 생물학적 부모, 레오니와 마이클이 아니다. 할아버지, 할머니다. 조조는 “아빠(할아버지/리버)가 해주는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그 목소리가 자신을 향해 “뻗은 손 같고” 자신의 “등을 문질러 주고 있는 것만 같아서” 자신이 “아빠처럼 당당하고 자신감 있게 클 수 없으리라는 느낌을 전부 떨쳐 버릴 수”(34) 있다고 생각한다. 아빠의 모습, 행동 등을 모두 최고라 여기고, 그와 비슷해 지기 위해 노력하며 그에게 강한 아이로서 인정받길 원한다. 이상적인 아빠와 아들 사이의 풍경이다. 조조는 이것을 할아버지인 ‘아빠’와 함께 한다. “엄마(할머니/필로멘)”는 “생명을 주는 세상의 물(226)”이다. 조조와 케일라를 충분히 먹여 자신이 없는 세상에도 비축된 양식으로 세상을 살아 갈 수 있게 해주는 생명의 근원이다. 조조에게 있어 아빠/엄마는 기능적 호칭이 아니다. 사랑을 주는 존재, 유약한 자신을 지켜주는 존재, ‘집’으로서의 의미이다.
조조는 ‘엄마가 아닌’ 레오니와 아기동생 케일라와 함께 ‘집’을 떠난다. 사랑과 보호의 울타리, ‘아빠’ ‘엄마’를 떠나 위협의 세상과 조우한다. 그에게 위안이 되는 것은 아빠의 일부인 작은 가죽주머니, ‘집’과 이어주는 이 작은 매체 뿐이다. ‘집’을 떠난 그의 여정은 혼탁하다. 엄마가 아닌 레오니와 아빠가 아닌 마이클을 신뢰할 수 없다. 그들의 불안한 행태는 조조와 케일라를 계속해서 배고픔과 목마름, 질병과 위험에 노출시킨다. 조조의 눈에 레오니는 뭐든 죽이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랬을 것이다. 자신이 ‘아빠’가 되어 뭐든 죽이는 레오니로부터 케일라를 보호한 것은. 점점 ‘아빠’를 닮아가는 조조에게서 보여지는 케일라에 대한 의지는 분명 ‘부정(父情)’이다. 그는 케일라의 ‘집’이다.
레오니라는 이름은 레오니에게 실망을 주는 이름이다. ‘엄마’, ‘딸’로 불리지 못하여 사용되는, 대체 호칭이다. 그녀는 늘 가족 내에서의 자신이 정서적인 유대감을 기반한 자리가 아니라, 형식적인 자리에 머물 뿐이라는 것을 시리게 느낀다. 그녀는 진술한다. “이제 그는 내 이름 말고는 달리 무엇으로도 나를 부르지 않는다. 그럴 때마다 그게 꼭 내 뺨을 후려치는 소리로 들렸다.(71)”
레오니는 ‘엄마가 아닌’ 엄마다. 끊임없이 엄마가 되고 싶어하지만 그녀가 원하는 것은 ‘집’이 되어주는 엄마가 아니라, 자기 본위의 엄마다. 아이들에게 필요한 엄마가 아니라, 엄마역할에 대한 자만심을 추구하는 엄마다. 이러한 면모는 케일라에게 ‘미카엘라’라는 이름을 고집하는 데서 드러난다. 케일라를 사랑하는 모든 가족 구성원이 부르는 이름은 케일라이며, 케일라로 불릴 때 아기는 안정감을 느끼고 기뻐한다. 케일라는 ‘미카엘라’로 자신을 부르는 레오니를 거부한다. 레오니는 케일라로 정체성이 굳어진 딸이 자기만족을 위한 ‘미카엘라’ 이기를 바란다.
모성이 없는 엄마, 레오니. “반쪽짜리 마음(145)”을 가진 레오니. 왜 일까? 그녀는 오빠인 기븐을 죽이고 사고사로 덮은 집안의 아들을 사랑한 데서 온 죄책감이 있었을 것이다. 그녀에게 있어, 17세의 어린 나이에 ‘주어진(given)’ 조조는 사고였으며, 미처 모성을 키울 정신적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자신이 백인을 사랑한 흑인이며, 그의 가족들에게 절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라는 자격지심이 그녀의 정신적 성장을 저해 했을 것이다. 그렇게 그녀는 17세의 그 자리에 머물러, 자식에게 내어 줄 것이 없는 텅빈 가슴을 품고 있을 것이다.
‘나 집에 가’
묻히지 못한 자, 리치. 죽어서도 한과 슬픔의 땅 파치먼을 맴돌아야하는 슬픈 존재. 그가 리버에게로 향한다. “없으면 죽을 것 같은 사람(309)” 리버에게로. 리버는 파치먼의 혹독한 시간 속에서 그의 형이었고 부모였기에. 그래서 리버는 리치에게 ‘집’일 수 밖에 없다.
리버는 리치를 보지 못한다. 시간의 공간을 살아낸 리버는 더 이상 리치의 리버가 아니다. 조조와 케일라의 ‘아빠’다. “리버는 그들과 같은 공간에 있지 않을 때도, 그들과 몸을 맞대고 있지 않을 때도 그들을 안고(337)” 있다. 그것을 바라보는 리치는 속이 뒤틀어 진다. 너무나 아프다. 리버의 집 어두운 구들장 밑에 자리한 자신,그 부재와 고립이 사무친다. 이 곳을 벗어나 금빛섬으로 갈 수 있을 테지. 잃어버린 마지막 한 조각의 기억만 찾는다면… 리버가 얘기 해 줄테지. 조조가 도와 줄테지. 하지만 리버의 마지막 이야기, 일생 리버의 가슴에 시커먼 대못으로 남아있던 그 이야기는 죽은 자가 마땅히 가는 금빛섬을 향한 문을 닫아 버린다. 리치의 날개를 꺾어 버린다. 산 자의 땅에서 유령으로 떠돌아야 하는 리치를 운명 짓는다. 그토록 그리워 했던 그의 ‘집’이 산산이 부서진다
워드는 ‘집’을 토대로 이야기를 구축한다. 그녀의 세계에서 ‘집’은 물리적인 공간이 아니다. 사람이고, 사랑이고, 신뢰이며, 근원이다. ‘집’이 없는 자는 레오니처럼 반쪽짜리 삶으로 불행의 씨앗을 품기도 하고, 리치처럼 출구없는 이상향을 찾아 정처 없이 떠돌기도 한다. ‘집’을 품은 자는 조조처럼 단단하고 가슴이 넉넉하다. ‘엄마’처럼 자체가 ‘집’인 사람은 축복의 이름으로 주어진(given) 자식을 맞고, 레오니처럼 ‘집’이 부재한 사람은 사고처럼 자식이 주어진다.(given). ‘집’은 인간의 영원한 향수이며, 염원이다.
구도가 훌륭한 작품을 만나면, 작품의 공간에 z좌표로 대변되는 나만의 세계를 짓고 싶다. 작품에 드리워진 내 고유한 구조물, 작품에 대한 나의 평가이며 해석이다. 오늘의 글이 그렇다. <묻히지 못한 자들의 노래> 위에 지은 나의 성이다. 내 성에서 조망되는 작품은 ‘집’을 축으로 돌아간다. 그들의 갈등, 그들의 슬픔, 그들의 한, 그들의 사랑이 그 축을 따라 회전목마처럼 돌아간다. 어느새 나의 세계, 나의 삶도 함께 어우러져 돌아간다. ‘집’에 암시된 우주가 가슴에 먹먹히, 촉촉히 스며들며 돌아간다.
“집은 땅이 중요해. 땅이 너에게 자기를 열어주느냐 아니냐가. 땅이 너를 가까이 끌어 당겨서 둘 사이 거리가 없어져 둘이 하나가 되어 땅이 네 심장박동으로 뛰느냐가 중요해. 동시에 뛰는 거 말이야.(2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