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사에 숨겨진 왕들의 피정
숱한 풍경과 이야기를 담으며
같이 뜨겁게 살아준 카메라를
오랜만에 돌보아 준다.
안식월이 되니,
카메라의 빈 곳도 눈에 든다.
카메라 하나는 잡은 손의 악력과 땀을 견디느라 손잡이 가죽이 많이 헤어졌고,
렌즈 하나는 세상과 사람을 두루 살펴 보느라, 초점 조절이 분명치가 않다.
종로에 있는 카메라 as 센터를 찾았다.
평일 낮이라, 사람은 없었고,
늘 몇 일은 걸리던 수리 시간은 두시간이면 된다고 했다.
"그럼...
동네 한바퀴 돌고 오겠습니다."
내가 많이 좋아했던 동네다.
인사동, 계동, 피맛골, 북촌, 체부동, 익선동, 부암동, 인왕산.
내가 안동 김씨라 그런가, (세도정치는 미안합니다.ㅋ)
김두환이 쥐락펴락 했다던 이 종로바닥에서
스무살 상경 이후, 대부분의 여가 시간을
노닐고 만나고 걷고 사랑했다.
곳곳에 추억이 깃든 시절의 아득한 마음이 들어,
골목 구석들을 배회하자 마음먹고
발길 닿는대로 걸음을 땐다.
볕은 좋고,
겨울은 떠남이 아쉬울 한줌만큼만 공기에 담겨 있다.
몇해전인가, 창덕궁 앞 한창이던 공사들도 마무리 되었는지,
율곡로를 따라 격조있는 산책로가 생겼다.
멋스럽다.
길담 곁, 양지바른 길을 따라 걷는데
익숙한듯 낯선 비좁은 골목들이
몹시 반갑다.
그러다 갑자기 큰 마당 하나가 눈 앞에 펼쳐진다.
종묘 앞뜰이다.
할아버지들은 계단에 걸터 앉아 하염없는 시간을 펼쳐 놓았고,
아이들 몇은 학교가 끝났는지, 먼지를 일으키며 축구를 한다.
한가로운 풍경에 나도 걸음을 늦추어 볕을 즐기는데,
종묘 매표소 앞에 조금씩 사람들이 모여든다.
발길을 천천히 옮겨 귀를 기울여 보니,
1시 20분에 해설사와 함께 종묘 투어를 한단다.
평일에는 자유 출입 대신에 문화재 보존과 향유 차원에서 10년동안 한 조치라 했다.
한 시간이 걸린다 했고, 입장료가 무려 천원이란다.
오케이. 콜!
곧 시간이 되었고,
목소리부터가 비범한 30대 언저리 쯤 되는 숙녀가 종묘 대문 앞에 섰다.
조선왕조 500년 역사의 근간을
자기와 함께 잘 둘러보자고 하며 우리를 이끈다.
그녀는 역사학도였고,
태평양 건너 한 학교에서 세계의 역사를 탐험했노라 했고,
지금은 조선의 역사를 애정하여 여기서 일한다 했다.
(너무도 심히 그것이 느껴져 내가 지어낸 말일 수도 있다.)
드디어
종묘를 들어선다.
그토록 다니던 동네였는데, 결국 난 종묘 담벼락만 더듬거렸던 거였고,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 도대체 어떤 땅이었는지,
비밀의 정원 같은 이야기가 여기, 잠자고 있었다.
#2.
시작부터가 예사롭지 않다.
여기는 제사를 지내는 곳이 아니라,
흡사, 왕의 정원 같다.
트인 마당, 그리고 세월을 가늠할 수 없는 소나무들.
이 두 조합의 운치만으로도 비밀의 문 하나를 연 느낌이었다.
그저 풍경에 이끌리어 몇걸음 몸을 조금 들이니,
이건 도대체 뭔가 싶을 길이 펼쳐진다.
돌에도 클라스가 있다는 걸 위엄있게 보여주는 듯한 친구들이
끝도 없이 길 위에 정갈하게 뻗어 있다.
그런데 이상하네.
길에 층이 있다. 그것도 세 층이 확연히 구분되는.
마치 금메달 은메달 동메달 단상이 쭉 뻗어 길을 만든 것처럼.
가장 높은 중앙 길은 신의 길이라고 했다.
이승을 떠난 왕들이 신(神)이 되어 밟는 길이라 인간은 누구도 밟지 못했다 했다.
좌측은 왕의 길, 우측은 신하의 길.
걸음하나 쉬이 내딛지 못하게 만든 길을 한발씩 내딛으며
조선의 시작과 닿은 이 땅의 엄숙함이
발끝부터 몸으로 스민다.
1392년 조선 건국
1395년 종묘 완공.
무려 630년 전,
조선의 처음이 담긴 이 땅을
이제서야 한걸음 한걸음 정성스레 즈려 밟는다.
본격적으로 종묘에 접어드니 조선 왕들의 신위를 모신 곳.
정전에 이른다.
끊김없이 뻗어 110미터에 이르르기에 좌우로 오래 훑어 보아야하는 정전은
장엄한 월대(높이를 위해 쌓은 단)위에 단아하게 얹혀 있다.
헤아릴 수 없는 기와공사를 한번에 얹어야 하는 공사를
대대적으로 하고 있어 분주 했지만,
알수 있었다. 정전의 품격을.
#3
서론이 길었다.
사실 난 이글을 쓰는 이유가 이게 아니다.
지금 부터다.
정전도 정전인데,
중요한 건 태조다.
태조는 조선을 시작하며 300년을 봤다고 했다.
300년 동안의 모실 신위의 공간을 생각했다 했다.
나라를 만들며,
나의 목숨이 끝이 아니라,
조금 더 확장해서, 내 다음 세대가 끝이 아니라,
300년을 건재할 조선을 생각하며 나라를 세웠고,
그 뜻의 지표가 이 종묘의 설계라 했다.
무언가를 만들며
300년을 생각하는 마음은 도데체 무얼까
나라를 만드는 이들은 이렇게 수세기를 생각하며 나라의 그림을 그리었던가.
내가 보고 있는 시간의 끝은
얼마쯤인가.
마음에 큰 바람이 인다.
더군다나 종묘는
후대 왕들의 신위를 모실 공간이 모자라
정전과 같은 구조의 양녕전을 짓기에 이르렀고,
조선은 518년을 향유한다.
지금 우리가 만나는 것들 중에 300년 후를 생각할만 한게
무엇이 있나.
난 그저,
어쩌다 10년을 끌어온 회사가
이리도 놀랍고 버거운데 말이다.
태조가 궁금해졌다.
그가 보았던 시간이 궁금했다.
#5
제의를 위해 왕이 기거하던 곳,
어재실에 이르렀다.
해설사가 재미난 퀴즈 하나를 낸다.
"제사는 한해에 몇번이나 했을까요?"
"한번 아닌가요? "
"일년에 봄, 여름, 가을, 겨울, 새해, 이렇게 다섯번 제의를 드렸습니다.
"네?"
"그럼 한번하는 제사의 기간은 몇일이었을까요?
"하루 아닌가요?
"일주일간 내내 했습니다.
"네에에?"
"그리고 제사는 남자의 일이라,
왕과 신하가 직접 음식을 만들고, 제의의 모든 준비를 왕들이 직접 했습니다.
모든 정사를 뒤로 하고요. "
"네에에에?"
왕들이 직접요?
투어를 하는 내내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왕들에게는 이 시간이 뭐였을까.
그렇게 생각에 잠겨 무리를 따라 걷다가
악공청(종묘제례악을 위해 악사들이 머물던 공간)에 다다랐다.
악사들이 제례악을 위해 대기하는 곳, 쉬는 곳, 머물던 곳들이
왕의 공간들에 버금갈 만큼,
여러 채에 나뉘어 운치를 자랑했다.
일주일, 그리고 다섯번에 걸친 제의 기간에
제사 의식만큼 중요한 것이 재례악이였다는 설명은
공간을 살피는 것만으로 너무도 분명히 알수 있었다.
이건가.
5주를 종묘에 머물수 있었던 비밀.
모든 정사를 뒤로하고,
그저 선조들의 신위 앞에 일주일을 머물며,
음악과 함께 살았던 시간이.
이건가.
조선왕조 500년 역사의
장엄함을 떠받이고 있던 월대 같은 시간이?
그렇게 모든 나랏일을 제쳐두고 보낸
한해 다섯주의 시간이
왕들에게는 과연 자기를 완연히 비울 수 있는 피정이었을까.
나는 왜 이 종묘가
조상을 모시는 공간으로 들리지 않고,
안식의 공간으로 들릴까.
안식월이어서 그런가.
내 안식의 공간,
멋이 있고, 잉여가 있고, 비움이 있는
어떠한 여백을 꿈꾼다.
안식월이 끝나도
삶에 안식을 들일 수 있는
그 어떤 리추얼을 꿈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