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새벽숨 May 23. 2024

사랑을 구하는 외계어


로디 말문이 트인 건 22개월. 그런데 31개월이 된 로디는 여전히 다양한 외계어를 구사한다.


(설거지하는 내 등 뒤에서) “엄마! 로디 방금 띠그륵띠그륵 했어!”

“오, 그랬어? 어떻게 했어?”

“(손짓으로 무언가 하면서) 이렇게, 이렇게 했어!”

“오, 진짜? 재밌었겠다!”


저녁에 로디를 거실에 혼자 두고 씻어야 할 때가 많다. 문으로 단절되면 로디도 나도 많이 불안하기에 (성별은 다르지만) 아직은 괜찮은 듯하여 욕실 문은 열어두고 안전문만 닫은 채 씻는다. 그런데 3분쯤 지나면 거실에 있던 로디가 “엄마, 엄마!” 소리를 지르면서 우다다다 달려온다. 그러면 안전문에 매달려서 종알종알 이야기를 한다.


“엄마, 세수해요?”

“응, 화장 깨끗하게 지워야 해.”


“엄마, 머리 감아요?”

“응, 머리 감고 있어요.”


“엄마, 목욕 다 했어요?”

“아니, 아직 더 씻어야 해.”


그러다 불쑥 이야기가 시작된다.


“엄마! 로디... 로디...! 자동차가 슈웅 날아와서 빨간불에 멈춰야 돼! 강우(가명)가 아파서 삐용삐용 아저씨가 와서 강우가 집에 갔는데 (숨 쉬고) 세영이가 앙 물어서 로디가 죄송합니다 했어요.”


아는 단어들을 총동원하여 스토리를 만든다. 꽤 그럴듯한 이야기도 많아서 선생님께 물어볼 때도 있다.


“선생님, 로디가 어제 세영이 물었나요...?”

“아뇨...? 로디가 그러던가요?”


대부분 로디의 말은 사실과 달랐지만 김영하 작가가 말하지 않았던가. 아이들의 거짓말을 무조건 혼내지 말라고. 그들은 창작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로디가 만드는 이야기, 그리고 오물거리는 입으로 던지는 알 수 없는 단어들이 재미있다. 듣는 이는 알아들을 수 없지만 매우 흥분된 표정과 목소리로 무언가를 설명하는 로디를 보고 있으면 나까지 기분이 좋아진다.


나는 5살 때까지의 기억이 거의 없다. 지극히 단편적인 기억만 조각처럼 남아있는데 그 중에서도 꽤 또렷한 장면이 하나 있다. 엄마가 검은 색 전기 테이프로 부업을 하느라 바쁘셨는데 로디만한 내가 무언가를 가리키며 “엄마! 이거 따이따이지아또야!”라고 말하면 엄마가 다정하게 “응, 그랬어?”라고 대답해주는 장면. 놀이에 가까운 이 대화는 두세 번 더 이어진다. 그때마다 엄마는 “응, 응. 맞아.”라고 대답해준다. 그 때 나는 속으로 ''따이따이지아또'가 진짜 있는 말이야?'라고 생각했다. 나도 내가 헛소리를 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계속 외계어를 내뱉었고 엄마는 그때마다 내가 원하는 따듯한 눈길을 건네주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로디만큼 어렸던 나는 재미난 발음을 가지고 엄마의 다정한 눈길과 목소리를 구했던 것 같다. 특별히 할 말도, 엄마의 관심을 끌만한 사건도 없었지만, 그래서 이상한 단어들과 이야기를 지어내야 했지만 큰 힘을 들이지 않고도 엄마와 마주하고 대화할 수 있다는 사실이 기뻤던 것이다.


아마 로디도 그렇겠지.

엄마의 사랑 가득한 시선을 구하기 위해 머릿속, 입 속에서 말도 안 되는 단어들을 만들고 던지는 거겠지.




사랑하는 로디.


어제 저녁에 로디가 그랬지.

강우한테 깜깜한 밤을 보여준다고 손으로 눈을 가렸는데

강우가 하지 말라고 해서 ‘죄송합니다’ 했다고.

반신반의하며 선생님께 물었는데

강우가 아니라 세영이랑 손을 씻는 과정에서

작은 실랑이가 있었다 하더라고.

어쨌든 친구에게 사과한 건 맞더라.


비록 사실과는 다르지만

기억에 남는 사건으로 잘 짜여진

로디만의 이야기가 엄만 참 재밌어.


가끔은

‘이게 진짜면 큰일인데.’하는 이야기도 있지만

그런 큰일이 있었다면

선생님이 엄마한테 얘기하셨겠지 싶어

놀란 마음 내려놓고 즐기면서 듣는 중이야.  


이제 30분쯤 후에 로디를 만나겠다.

오늘도 로디는

“오늘 어린이집에서 뭐했어?”라는 질문에

드럼치는 흉내를 내며 “띠그띠그했어!”라고 답할까?

전자 알림장을 보니 오늘은 강우 생일 파티를 했던데

과연 ‘생일 파티’ 단어가 나올까.


그런데

띠그띠그가 사라지면 그것도 서운할 것 같아.

로디만의 ‘보’모양 브이가 완벽한 브이가 되었을 때

아쉬움이 있었던 것처럼.


내일도 부디

아무 일 없이 ‘띠그띠그’ 잘하고 와서

엄마한테 자랑해주길 바라.  


“엄마! 로디 띠그띠그했어!”


어느 날의 띠그띠그


이전 09화 “우리 손주만 없어 씽씽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