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상선암 일기 7
암을 진단 받은 후부터 수술을 받은 날까지도 심적으로 힘든 적은 없었다. 그래서 나의 갑상선암 이야기를 이끌어 온 주인공은 환자인 내가 아니었다. 굳이 꼽으라면 나 때문에 마음 고생이 많았을 부모님일 테다. 하지만 수술 다음 날부터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엄마로 선명히 드러났다.
2017년, 나의 27세를 돌아보면 엄마를 잃은 엄마가 떠올라 속이 아리다. 그래서 잘 돌아보지 않는다. 그 시기에 내가 했던 기도는 내 몸이 아니라 엄마의 마음이 낫는 것이었다. 아프지 않을 수 없는데, 고통이 없을 수도 없는데 상처가 드러나지 않은 엄마의 마음이 때때로 신경 쓰였다.
수술 다음 날 아침, 내 상태는 꽤 괜찮아져 식사가 가능했다. 아침을 먹던 중 엄마한테서 전화가 왔다.
“새벽이 일어났어?”
“응, 밥 먹고 있어. 엄마는 출근했어?”
“어. 오빠야랑 시간 잘 보내고 있어. 엄마는 퇴근해서 갈 수 있으면 갈게.”
“응. 시간 되면 와. 혼자도 잘 있어. 근데 할머니는? 괜찮으시대?”
“응. 괜찮다. 밥 잘 먹어.”
전화를 끊었다. 엄마 목소리가 약간 떨렸고 묵직했다. 내가 걱정되어 그런가 싶었지만 할머니는 괜찮으시다 하니 신경 쓰지 않았다. 밥을 다 먹고 오빠와 보드게임을 했다. 병원에 입원해 본 적이 없어서 어떤 방법으로 시간을 보내야 할지 몰라 보드게임을 챙겨갔는데, 스스로를 준비성이 철저하다며 추켜세운 후 보조의자에 오빠를 앉혀 게임에 몰두했다. 그런데 게임을 하던 중 오빠한테 전화가 왔고 병원 복도에서 20~30분을 넘게 통화했다. 통화를 마친 오빠는 '지금 연구실에 일이 생겨서 오늘 가봐야 겠다'고, '혼자 있을 수 있겠냐'고 물었다. 뭐 내가 애냐고, 다녀오라고 쿨하게 얘기하곤 게임을 다시 시작했다.
한창 게임을 하고 있는데 진동이 여러 번 울렸다. 하지만 꽤 잘 진행되던 판이어서 신중하게 내 차례를 끝내고 오빠 차례로 넘어갔을 때 핸드폰을 열어봤는데,
...
‘말문이 막힌다’는 것을 경험해 본 적이 없다, 이전에는. 예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나면, 그것이 너무 놀라운 일이면 목구멍이 열리지 않는다. 눈도 멈추고, 숨도 멈춘다. 채팅방에 올라와 있는 건 글이 아니고 사진이었다. 검은 액자에 갇힌 외할머니 사진. 게임한다고 미뤄뒀던 메시지 내용이 할머니의 죽음이었던가.
행동이 멈춘 날 보고 오빠가 무슨 내용인가 싶어 내 핸드폰을 보았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오빠를 봤다. 나만큼이나 천천히 고개를 드는 오빠와 마주쳤는데 눈이 서서히 빨갛게, 축축히 젖어갔다. 왜 놀라질 않아. 알고 있었던 거야?
진동이 울렸다. 엄마다.
"이게 뭐야...?"
"그걸 아빠한테 보낸다는 게 거기다 보냈네... 어떡해..."
"지금 어딘데...? 대구야? 출근했다며... 출근했댔잖아..."
떨렸다. 바들바들 몸도 목소리도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 통화를 어떻게 끊었는지도 모르겠다. 아까 오빠가 한참을 통화했던 사람은 엄마였고, 연구실 사람을 만나러 간다던 건 외할머니의 장례식에 간다는 뜻이었다. 오빠는 내가 충격받을까봐 말도 못하고 정리되지 않은 정신으로 게임까지 했으니 그 속이 말이 아니었을 것이다. 내가 모든 걸 알게 되자 오빠는 미뤄뒀던 애통함을 터뜨리고 흘려보냈다. 감추느라 고생했겠구나.
외삼촌과 함께 사시던 외할머니는 아파트 1층 주차장에서 후진하던 차량에 박으셨다. 운전자는 60~70대 남성이었고, 할머니는 골반 골절 및 출혈로 오래지 않아 하늘로 가셨다 한다. 그 마지막을 본 사람은 큰이모네 딸인 내 사촌동생이었다. 간호사였던 동생은 장례식에 함께 하지 못해 미안하다는 나에게 할머니의 마지막이 어떠했는지 전화로 알려주었고 언니 몸이나 잘 추스리라며 걱정해주었다. 형제가 많은 엄마 덕에 사촌 형제가 많은 나는 그날 전화로 동생들의 위로를 들으며 '우리 할머니, 든든한 손자·손녀들 두셔서 흐뭇하시겠다'고 생각했다.
사고사였기 때문에 경찰 조사가 이루어졌고 장례를 치르는 데 많은 도움을 준 교회에 인사를 드리느라 부모님은 일주일을 대구에서 보내셨다. 그러고 집으로 돌아온 엄마는 아직 회복 중이라 팔을 잘 쓰지 못하는 나를 꼭 안지도 못하고 눈물로 등을 토닥여 주었다.
이 순간에도 수많은 생명들이 떠나지만 세상은 그대로다. 우리도 빨리 일상으로 돌아와야 했고 나는 2주간의 병가를 끝낸 후 출근을 했다. 어느 날 퇴근하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아빠가 설거지를 하고 계셨다. 엄마가 힘드니 아빠가 애써 주는구나 싶어 나도 웃으면서 "엄마, 나 왔어!"라며 방으로 들어갔다.
문을 열고 처음 보인 장면은 핸드폰을 들고 엉엉 울고 있는, 무너져내린 엄마였다. 두 번째 보인 장면은 핸드폰 화면에 뜬 ‘엄마'라는 글자. 엄마는 닿을리 없는 수신자에게 계속 전화를 걸고 있었다. 이번엔 내가 엄마를 다독일 차례였다.
"그래, 다 울어. 많이 참았지."
"엄마 보고싶다, 엄마."
엄마는 엄마를 부르면서 울었다. 아무리 배우자가 있어도, 자식이 있어도 엄마가, 아빠가 떠나면 이 험한 세상에서 나를 가장 사랑하고 믿어주던 이가 사라진 것이기에 그에 대한 슬픔은 어떤 방법으로도 다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난 그렇게 사랑하던 외할머니를, 다음 주면 설 명절을 함께 보냈을 우리 외할머니를 떠나보냈지만 장례식장에 가보지도 못하고 2년이 지나서야 풀이 듬성듬성 자란 무덤가에 가볼 수 있었다.
우리 가족은 짧고 굵게 각자의 방법으로 아픔을 해소했다. 난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얘기를 들은 순간을 제외하고 단 한 번도 이 일들을 곱씹으며 운 적이 없었다.
엄마에게 사고가 닥치기 전까지는.
2017년의 고난은 끝난 게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