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상선암 일기 5
수술 D-1.
살면서 입원한 건 내가 기억하는 한 이때가 처음이다. (아기 때 경기를 일으켜 병원에 실려 갔다고 하지만 내 기억엔 없는 일이니.) 1월이라 추워서 두툼한 패딩에 기모 바지를 입었고 3~4일 지낼 용품들을 가방에 챙겼다.
입원실에 들어가기 전 간호사님께 이름, 주소를 확인하고 키와 몸무게 등 기본적인 신체 정보를 알려드렸다. 그리고 배정된 입원실. 내 오른편엔 할머니가 계셨고 내 머리 위엔 내가 받을 수술을 이미 받고 회복 중인 한 살 연상의 여성 분이 계셨다. 암 병동이라 분위기가 어두울 것 같았으나 딱히 그렇지도 않았다. 할머니는 어떤 암이셨는지 기억나지 않고 그리 말씀이 많지 않으셨다. 그런데 이 언니(?)는 어쩜 그리 살가운지 나에게 스스럼없이 다가와 본인의 수술 경험담을 얘기하면서 걱정할 필요 없다며 격려해 주었다. 힘이 되었다. 일면식도 없던 타인에게 이렇게 친절히 자신의 스토리를 풀어놓을 수 있는 공간으로는 병원이 참 안성맞춤이다. 같은 아픔을 공유하는 것이 사람에게 그렇게 위안이 되는 일인가보다. 그런데 아무래도 이 언니 얼굴이 낯익어서 “혹시”라는 단어 뒤에 내가 졸업한 학교와 참여했던 모임들을 읊었으나 겹치는 곳은 없었다. 어쨌든 그 언니 덕에 무거웠던 병실 공기의 무게를 살짝 덜어낼 수 있었다.
그날 저녁이 뭐였는지, 가족들과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밤중에 간호사님들이 피를 뽑고 시간마다 혈압을 잰 탓에 잠을 설쳤다.
이후 기억나는 장면은 긴 머리가 수술에 방해되지 않도록 근 20년 만에 엄마가 내 머리를 땋아 준 순간이다. 어릴 때도 싫어했던 삐삐머리를 27세에 하고 있으려니 영 민망할 따름이었다. 그땐 수술이란 것을 경험해보지 않았으니 그런 사소한 것이 신경쓰였다.
수술방으로 옮겨질 때까지 침대에 누인 채 병실 밖 복도에서 대기했다. 엄마는 곧 수술대에 올라갈 딸을 가만히 보았다. 7살 때처럼 머리를 양 갈래로 땋고 멀뚱한 눈으로 천장의 형광등을 쳐다보고 있는 여전히 어린 딸을 보며 기도했다.
이 자리에서 무사히 다시 만날 수 있길.
혹여나 있을 위험한 상황을 피할 수 있길.
남편은 회사에, 아들은 타지에 두고 혼자 딸을 수술방으로 보내야 하는 임무를 잘 해내기 위해 엄마는 마음을 단단히 잡으려 딸이 누운 침대 난간을 꼭 쥐었다. 난 그런 엄마와 눈을 마주치는 것이 왠지 쉽지 않아 그냥 허공을, 오른쪽 하얀 벽을 쳐다보았다. ‘왜 이렇게 교수님이 안 오실까.’라며. ‘빨리 수술하고 끝내고 싶은데.’라며.
그러면서 10여분 지났나, 교수님이 오셨다. 내 기분과 컨디션을 확인하셨고 엄마께 수술 시간과 수술방에서 나온 후 마취가스가 다 나올 때까지 나를 재우면 안 된다는 등의 주의사항을 말씀해 주셨다.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위로와 함께.
그리고 곧 들려 온 목소리.
“새벽님, 수술실로 이동할게요.”
아! 드디어 수술을 하는구나. 새로운 경험(?)에 약간 설레기까지 했던 이때의 나에게 고마움을 표한다. 어차피 수술 후 감내해야 했던 고통은 나중 일이었다. 그 고통에는 내 몸 하나 아픈 것 뿐 아니라 정말 사랑했던, 수술 후 다음 주면 만났을 가족의 죽음이 기다리고 있었지만, 그래. 수술을 앞둔 그때만큼은 아무것도 모른 채 그냥 양 갈래 머리가 창피한 정도의 어려움만 있어도 아무 문제가 없었다.
과거의 나를 보며 깨닫는 것이 있다. 어차피 어려운 일이 닥치면 힘든 건 매한가지다. 대비한답시고 미리 아파해봤자 멀쩡한 시간에 상처를 남기고 그것은 곧 손해보는 길이다. 물론 태어나길 ‘아픔 앞에 미리 예방주사를 놓는 사람’으로 태어났지만 그래도 때로는 그때처럼, 암을 진단받고 수술을 앞둬도 아무렇지 않았던 그때의 나처럼 천연덕스러운 마음을 불러들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여기서 기다릴게
엄마 말을 뒤로 한 채 수술방에 들어섰다. 서른 살의 나는 감히 흉내낼 수 없는 강인한 마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