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널의 끝은 또 다른 터널의 시작이다

아이들을 만나기까지(열세 번째 이야기)

by 옥민혜

피검사 당일 날 나는 내가 좋아하는 커피 브랜드의 아이스 캐러멜 마키아토를 한 잔 사 들고 병원으로 갔다. 접수를 하면서 간호사에게 이미 생리가 시작됐다고 말했다. 간호사는 유감스러운 것 같기도, 안타까운 것 같기도 한 표정을 지으며 내 손에 들려 있는 커피를 바라보았다. 임신이 간절한 난임 여성은 되도록 커피를 잘 마시지 않는다. 피검사 전에는 더욱 그렇다. 그것으로 나는 이미 마음을 내려놓았음을 보여주었다. 형식적인 진료를 마치고 의미 없는 피를 뽑은 나는 간호사에게 그동안 그 병원에서의 내 진료기록을 모두 복사해 달라고 했다. 그것은 이제 이 병원은 오지 않겠다는 의미기도 하다. 그곳에서 나는 2번의 인공수정, 2번의 난자 채취, 4번의 이식, 두 번의 유산을 겪었다.






내가 걷고 있는 이 길이 '터널'일까, '동굴'일까에 대해 참 많이 생각했었다. 만약 오래 걸리더라도 임신이 된다면 그 길은 터널인 것이고, 아무리 해도 임신이 되지 않는다면 결국 동굴일 것이라고, 더 들어갈수록 불행해 지기만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시험관 과정이 몸보다 정신적으로 더 힘든 건 바로 그런 생각들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병원에서의 마지막 차수가 실패로 끝날 그즈음, 즉 임신을 시도한 지 4년이 되어갈 무렵 나는 그 길이 터널인지 동굴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결코 '임신의 여부'가 아님을 알게 되었다.


난임의 과정은 절대 동굴 속이 아니며, 임신 성공 역시 터널의 끝이 아니라 또 다른 터널의 시작일 뿐이다.


꽤 묵직한 진료기록부가 든 봉투를 안고 나오면서 나는 마침내 터널의 끝을 보았다. 임신과 관계 없이 터널 밖으로 나오게 된 순간이었다. 병원을 나서자 작열하는 한 여름의 태양이 내리쬐고 있었다. 무언가로부터 해방된 듯 한 느낌이 들었다.


그 해 여름은 무척이나 더웠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오래 묵었던 생각들과 '칩거'라고 밖에는 설명할 수 없는 나의 일상들도 하나씩 정리해 나가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내가 다녔던 학교의 선배를 만나고, 교수님을 찾아뵈었다. 모두가 반갑게 맞아주었고, 그 간의 내 사정을 들으시고는 언제든 돌아와 다시 공부를 시작하기를 환영한다고 하셨다. 내게는 돌아갈 곳이 있었다. 동굴일지 터널일지를 결정하는 열쇠는 결국 내 안에 있었다. 나는 스스로 그 문을 열고 나와 터널 끝으로 향한 내가 자랑스러웠다.


마지막으로 딱 한 번. 평생 후회가 남지 않도록 딱 한 번만 더 해 보자. 그리고 이번에도 안 된다면 미련 없이 학교로 돌아가자. 아이가 없는 삶을 다시 계획해 보자, 그렇게 마음을 먹었다. 그리고 남편에게 마지막으로 물어보았다. '정말 아이 없이 살아도 괜찮겠느냐'라고. 남편은 늘 그랬듯이 '상관없다'라고 대답했다.






내 평생의 마지막 시험관은 병원을 옮겨서 진행하기로 했다. 옮긴 병원은 일반 산부인과와 난임 클리닉이 함께 있는 규모가 꽤 큰 곳이었다. 기존에 다니던 병원보다 집에서는 훨씬 더 멀었다. 대구에 아주 유명한 난임 전문 병원이 있는데, 서울에서 그곳까지 다니는 사람들도 있다. 매 번 ktx를 타고 그 먼 대구까지 다니는 것이다. 그것에 비하면 한 시간 거리는 생각에 따라서는 매우 가까운 거리다. 마음을 모두 비우고 간 곳이어서 그런지 모든 것이 편안하게 느껴졌다. 나이가 지긋한 담당의의 첫인상도, 깔끔하고 세련된 병원의 인테리어도, 여기저기 보이는 갓난아기들과 임산부도 모두 정겹게 느껴졌다.


병원이 바뀌었고, 의사가 바뀌었으니 시술 과정에서의 차이점도 여러 가지가 있었다. 먼저 의사는 과배란 전에 '자궁내시경'을 해 보자고 했다. 이전 병원에서는 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자궁내시경이란, 위 내시경이나, 대장 내시경처럼 자궁 안을 살펴보는 것인데 그때 만약 자궁 안이 깨끗하지 않다면 그것을 제거하는 시술까지도 한 번에 이루어진다. 검사 결과 나는 자궁 내에 '폴립'이 좀 있어서 모두 깨끗하게 제거하는 시술까지 진행했다. 대장 내시경을 하다가 용종이 보이면 제거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보면 될 것이다.


또 이전 병원에서는 '자궁내막 자극술'이라는 것을 매 번 시행했었는데 옮긴 병원에서는 그것을 하지 않았다. '자궁내막 자극술'이란, 과배란을 시작하기 전에 자궁 내막에 인위적인 상처를 내는 것으로, 그 상처가 아무는 과정에서 배아의 착상률을 높여준다는 이론에 근거한 것이다. 이것은 의사들 마다 조금씩 견해의 차이가 있는 모양이다. 그것이 착상에 도움을 준다는 쪽은 반드시 시술 때마다 시행을 하고, 반대 입장이라면 하지 않는다. 내 입장에서는 하지 않는 편이 좋았다. 기분 나쁘게 아프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궁에 일부러 상처를 내다니, 안 그래도 혹사당하는 난소로 힘이 드는데 자궁에까지 일부러 상처를 입히는 것은 아무래도 내키지 않았다.


새로 만난 담당의에게 '나는 약에 비해 난포가 매우 많이 자라는 편'이라는 것을 강조해서 말해 주었다. 그것을 감안했음에도 역시나 이 번에도 과배란 과정에서 많은 난포가 자랐다. 그래도 이전보다는 조금 적은 19개의 난자가 채취되었다. 마취에서 깨어났을 때는 역시나 배가 아팠다. 그런데 이 병원에서는 내가 아프다고 말하자마자 곧바로 진통제를 놔주었다! 그 점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진통제를 맞고 조금 있으니 통증은 거짓말처럼 사라졌고 컨디션도 훨씬 좋았다. 늘 채취를 하고 나면 그다음 날까지 힘들었었다. 허리를 제대로 펴지 못했고, 아무것도 먹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진통제 한 대에 이렇게 편안할 수 있다니, 이런 것을 왜 그 병원에서는 놔주지 않았는지 이제 와서 화가 다 날 지경이었다. 진통제 덕분에 나는 잠시 휴식을 취한 후에 허리도 곧게 펴고 가벼운 몸과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순조로운 출발이었다.


3일 후 3일 배아 이식에 들어갔다. 지난 병원에서는 꼭 5일 배양에 성공한 배아만 냉동을 시켰는데 나의 새로운 담당의는 3일 배양 배아도 냉동을 시키겠다고 했다. 19개의 난자가 채취되었고, 그중 5개가 수정되었으며, 나는 그 날 신선 배아 2개를 이식하고, 나머지 3개의 배아를 냉동시켰다. 그 병원에서는 이식 날 편안하게 휴식을 취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다. 이식하러 들어가기 전에 약을 한 알 주었고 그 약을 먹고 이식 후에 잠을 좀 자라고 했다. 아마 긴장을 완화시켜주면서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는 약인 모양이었다. 원래 이식은 들어가자마자 5분 정도면 끝난다. 이식이 완료되자 담당의는 '이제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다. 이제부터는 하늘에 맡기자'라고 말하며 내 무릎을 다정하게 두드려 주었다.


이식 후에는 개별 병실로 옮겨져서 휴식을 취했다. 착상에 도움이 되는 수액도 놔주었다. 이 것 역시 이전 병원과 다른 점이었다. 그 수액을 맞으면서 한 숨 자거나 편안히 휴식을 취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 이식 전에 미리 받은 약을 먹었음에도 평소에 워낙 불면증이 심하고 예민한 나에게는 그 약이 별로 소용이 없었다. 눈만 멀뚱멀뚱 뜬 채 1시간 정도를 누워있다가 수액이 다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고는 바로 일어나 집으로 돌아왔다. 이식 후에도 기분 좋게 하루하루를 보냈다. 친정부모님을 모시고 가까운 곳으로 여행도 다녀왔다. 난자 채취 후에 통증 없이 지낼 수 있다는 것이 내게는 매우 중요한 부분이었던 것 같다. 그동안은 통증으로 인한 컨디션 난조로 몸이 엉망이었고, 늘 그런 상태로 이식을 받고 피검사 때까지 초조하게 지냈었다. 통증이 덜 하니 이후의 생활도 확실히 달랐다.


옮긴 병원에서는 이식 후에 '크녹산'이라는 배 주사를 추가로 맞았다. 이전 병원에는 없던 주사다. 이것은 일종의 혈액응고를 막아주는 주사제인데, 자가 주사치고는 꽤 아픈 주사에 속한다. 그리고 아픈 것보다 더 힘든 것은 멍이 너무 많이 든다는 것이다. 혈액응고를 막아주는 역할을 하다 보니 주사를 맞고 나서 지혈도 잘 되지 않는다. 멍이 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주사를 놓을 때 같은 배라도 좀 더 아픈 부위가 있고, 덜 아픈 부위가 있으며 특히 배꼽 주변은 혈관이 많아서 피가 많이 날 수 있어 꼭 피해야 한다. 주사를 놓은 자리가 전부 멍이 들고 그 주사를 임신이 확인될 때까지 계속 맞아야 하다 보니 나중에는 주사 놓을 자리가 없어서 애를 먹기도 한다. 배 전체에 빈자리가 없이 온통 피멍 자국이었다. 바늘 하나 꽂을 자리가 마땅치 않아서 매 번 주사를 놓을 때마다 어디를 찔러야 하는지 위치를 찾는 데 시간이 꽤 걸렸다.


드디어 피검사 전 날이 되었다. 피검사 전에는 절대 임신테스트기를 하지 않는 것이 내 철칙이었는데 이 날은 왠지 한 번 해 보고 싶었다. 이것은 아주 미묘한 내 몸의 변화를 감지한 때문이기도 했는데, 아직 생리가 시작되지 않은 이유도 있었지만 며칠 전부터 갑자기 열이 확확 오른다거나 심장박동이 갑자기 빨라지는 등의 증상들이 있었던 것이다. 설레발치고 싶지 않아 태연한 척했으나 그런 미묘한 변화들로 인해 임신테스트기를 해 볼 용기가 생겼던 것 같다. 테스트기는 역시나 선명한 두 줄을 보여주었다. 매우 기뻤으나, 어쩐지 알고 있었던 일을 확인한 기분이랄까, 통쾌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다른 때와 마찬가지로 천정 엄마도, 남편도 격한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다. 그저 다 같이 깊은 기쁨과 감사를 잔잔히 공유했다.


기대와 실망이 수 없이 반복된 탓이었을까. 길고 긴 터널을 지나왔기 때문일까. 내가 머릿속에서 늘 상상하던 임신 확인의 순간은 올림픽에 나가 금메달을 딴 선수처럼 하늘 높이 두 팔을 쳐들고 환호를 지르는 내 모습과 얼싸안고 덩실덩실 춤을 추는 가족들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막상 현실의 나는 의외로 덤덤했고, 마침내 길고 긴 여정의 마침표를 찍는다는 마음으로 비장하기까지 했다. 다음 날 피검사 결과는 350대였다. 수치가 이렇게 높다는 것은 조심스럽게 쌍둥이 임신을 예상해 볼 수 있는 수준이다. 단태아라면 1차 피검사 때 이 정도로 높은 수치는 잘 나오지는 않는다. 나이 지긋한 담당의는 축하한다는 말도, 쌍둥이일 것 같다는 말도, 아무 말도 해 주지 않았다. 그저 2차 피검사 때 다시 보자는 말만 했다. 피검사는 매 주 시행되었고, 이렇게 피를 뽑아대도 되나 싶을 정도로 뽑고 또 뽑았다.


지난번 계류 유산 때 아기집 확인에 실패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이번에 아기집을 보는 것은 나에게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두 번째 피검사 날, 그러니까 임신 5주 차가 되는 날 드디어 나는 아기집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것도 두 개씩이나

5주.jpg 임신 5주차, 두 개의 아기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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