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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수소리 Aug 17. 2023

타슈켄트 재회 4

네가 나를 포기한 거야.

 1년 간의 유학생활을 마치고 귀국을 앞둔 어느 날, 중국 소설을 사러 서안외대 근처 서점에 갔다. 기숙사부터 따라온 아이비에커는 내가 서점에서 책을 고르는 몇 시간 동안이나 서성거리며 곁을 지켰다. 카운터에서 10권쯤 되는 책값을 지불하자, 그는 당연하다는 듯 책이 든 플라스틱백을 들었다. 서안의 겨울은 추웠다. 거리에는 두꺼운 패딩과 모자로 몸을 꽁꽁 둘러싼 행인들이 바삐 길을 가고 있었다. 서점을 나와 길거리 탕후루 매대를 지나치자 아이비에커가 후딱 뛰어가서 딸기 탕후루 하나를 사왔다. 나는 이런거 안 좋아하는데... 정성이 고마워서 딸기 탕후루 하나를 입에 무는 데, 그가 "잠깐 여기 있어봐."하더니 책들을 바닥에 놓고 냅따 뛰었다. 돌아온 그는 장미 한 송이를 건넸다.

 "이런 것도 주고 싶었는데, 그동안 기회가 없었네. 둘이 있을 기회가 별로 없었잖아."

 아이비에커는 그 때 빨간 모자를 눌러쓰고 있었는데, 코마저 빨개져있었다. 그는 다시 책이 든 플라스틱가방을 들었다. 버스 정류장으로 향하는 육교로 올라갔다. 육교 한복판 쯤 다다랐을 때 아이비에커가 돌연 멈추더니 나를 돌아보고 말했다.

 "너 귀국하고 나면 우리는 언제 다시 만나?(你回国后,咱俩什么时候再见?)"

 육교 밑 8차선 도로에 차들이 쌩쌩 지나가고 있었다. 대답을 묻는 그의 시선이 느껴졌다. 내 뇌리 속에는 한마디만 스쳤다. 우리 사이엔 미래가 없어.(我们之间没有什么未来)

 서점에 쫓아와 책을 고르는 몇 시간 동안 곁을 지키고, 지금은 두 손이 빨개진채, 무거운 책들을 들고 있는 그에게 이 말을 할 수 있을까. 나는 살짝 웃고는 육교 밑 쌩쌩 지나가는 자동차를 바라보며 말했다.

"다음 주 수요일?(下个星期三?)"

"너 다음 주 월요일에 귀국하는 거 아니야?(你不是下周一回家吗?)"

 내가 아이비에커를 돌아보며 웃자, 아이비에커가 표정이 굳어지며 화를 냈다.

"야, 나는 진지하단 말이야!!(欸,我是认真的!!)"




  15년 전 육교에서 화냈던 그 표정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그때 너 귀국하고서 1개월인가 절대 나한테 연락하지 않았을 때, 나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았어. 호흡도 안 되었고, 일상생활도 불가능할 정도였어."

 아이비에커는 지난날 나에게 받은 상처가 생각났는지 말했다. 나는 그를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네가 아무런 계획이 없었으니까. 결국, 내가 연락 안 한 게 아니야. 네가 나를 포기한 거야. (是你放弃我的)."


 나는 죄책감과 미안함을 훌훌 털어버리고 싶었다. 그를 무시하고 그에게 상처 주었던 지난날들에 내가 아파하지 않고 한 번도 궁금해하지 않으면서 잘 살아왔는데, 정작 15년 만에 갑자기 만나 융숭한 대접을 받으니 사실 미안해서 미쳐버릴 지경이었다. 왜 그동안 연락 안 했냐고 아이비에커가 지난날을 물어도 나는 할 말이 없었다. 니 나라가 선진국이 아니라서, 네가 전망이 없어 보여서, 네가 읽어보라던 코란을 읽어볼 생각이 없어서... 나는 솔직할 수 없었다.

 아이비에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네가 연락을 안 한 거잖아. 무슨 말이야."

 "어차피 내가 계속 연락했더라도 넌 나랑 결혼하지 않았을 거야."

 "나야 말로 네가 연락 오길 기다렸는데.."

 "나도 마찬가지야. 기다린 건 나야. 네가 계획이 있기를 나는 기다린 거지. 우리가 헤어졌을 때 네가 뭐라고 했어. '우리 또 언제 만나?' 도리어 나한테 물었잖아. 네가 나와 어떤 계획을 세우고 싶은지 너는 미래를 말한 적 없었어. 너는 그냥 나랑 연락만 하고 싶어 했잖아."

 아이비에커의 눈시울이 순간 붉어졌다.

 "왜 그런 생각을 너는 나한테 말하지 않았어. 혼자만 생각하면 다야? 네가 나한테 물어봤었어야지. 나의 계획을. 그랬다면 나는 바로 너한테 내 계획을 얘기했을 텐데."

 "네가 계획이 있길 나는 줄곧 4년을 기다렸어. 그렇게 헤어지고 4년 후 우리가 난징에서 만나서 헤어질 때 네가 뭐라고 했어. 네 부모가 무슬림이 아닌 여자는 안 된다고 했다면서. 아니야?"

 "내 마음은 그렇지 않았어. 나는 너랑 결혼하고 싶었어."

 "마음은 하나도 안 중요해. 행동이 중요하지. 너한테 그런 얘기를 듣고 나서 나도 지금 남편을 만난 거야. 네가 계획이 없었기 때문에 너를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던 거고."

 나의 나쁜 년은 거침없이 대사를 뿜어댔다. 20대의 나한테 빙의라도 된 듯싶었다. 이성의 끈을 풀어버리고 포효하고 있었다.

 "무슬림은 거의 다 부모가 안배해 준 대로 결혼하잖아, 안 그래? 나 사마르칸트에서 어떤 우즈베키스탄 청년을 마주쳤어. 걔도 한국여자랑 사랑에 빠져서 한국에서 유학까지 하면서 5년이나 만났는데 결국 엄마가 반대하니까 헤어졌다더라. 사실 나는 알고 있었어. 결국엔 네가 나를 선택하지 않을 것이라는 걸. 그때 같이 유학했던 파키스탄 얘들도 마찬가지였어. 그중 바짓이 중국여자랑 동거 중이더라? 우리가 놀러 갔던 날, 그 중국여자가 우리랑 같은 침대에 자면서 눈물을 뚝뚝 흘리며 우리에게 물었어. 언니 바짓이 저랑 결혼할까요? 우리는 알고 있었지. 그냥 중국여자는 동거 중인 거고, 바짓은 이미 모국에 부모가 안배한 약혼할 무슬림여자가 있다는 걸. 그래서 나도 알게 되었지. 아마 나도 바짓의 그 중국여자친구랑 다르지 않다는 걸."

 아이비에커가 말을 잃고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다 입을 드디어 뗐다.

 "너는 왜 혼자 생각하고 나한테 말을 안 해? 내가 어떻게 생각했는지 왜 나한테 묻지를 않아."

 "됐어. 다 옛날 얘기다."

 아이비에커와 내가 중국어로 서로에게 레이저를 발사하며 한참 얘기중일 때 주원이가 말했다.

 "엄마 저 똥 마려워요."    

 "얘 똥 마렵다네. 화장실 좀 다녀올게."

 주원이가 대변을 누고 밖을 나오니 아이비에커가 이미 계산을 다 하고 나와있었다.

 "갈까?"

 그는 대화가 갑자기 끝난 게 아쉬웠던지 나를 보며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나는 치~ 하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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