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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수소리 Aug 23. 2023

타슈켄트 재회 5

선글라스와 룸미러 사이

어두컴컴한 식당에서 나오니 아직 바깥은 볕이 쨍쨍했다. 15년 만에 만나 밥을 먹으며 미친듯이 대화를 나누다 환한 바깥으로 오니 현실로 복귀한 듯 했다. 짧은 시간에 밥먹다말고 나는 포효했고, 그도 포효했다. 다시 미술관으로 돌아가 그가 주차해놓은 검은 쉐보레에 유아차를 실었다.
 "이제 호텔로 돌아갈꺼지?(回酒店吗)"
 "그래.(好)"
 지난 날 못했던 말들을 일순간에 모조리 뱉어버렸기 때문일까. 날씨가 너무 더워서일까. 나는 맥이 풀려버렸다. 주원이와 나는 뒷좌석에 나란히 앉아 타슈켄트 시내를 둘러보았다. 우즈베키스탄의 차 90%를 차지한다는 모든 종류의 쉐보레가 콘크리트를 질주하고 있었다. 시내에는 광장이나 공원이나 걸어다니는 사람이 적었다. 40도가 넘어가는 날씨에, 이 한낮 땡볕에 거리를 활보하는 건 우리같은 관광객이나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왜.. 갑자기 말이 없어?(怎么不说话)"
 운전하고 있던 아이비에커가 운전석 룸미러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운전할 때만 쓴다던 안경을 쓴 아이비에커는 할말이 있다는 듯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옅은 미소를 띄며 고개를 저었다. 피곤하고, 맥이 풀려버려 뭐 딱히 하고 싶은 말이 없었다.
  "아이비에커 삼촌, 안경쓰니까 멋있다."

 조용하던 주원이가 아이비에커를 바라보며 말했다. 주원이는 아이비에커가 안경을 쓰지 않을 때는 무서운데, 안경을 쓰면 안 무섭다고 했다. 아이비에커가 주원이가 방금 무슨말을 했냐며 물었다.
 "니가 안경 쓰니까 잘 생겼대.(他说你戴眼镜很酷)"
 룸미러로 안경쓴 아이비에커가 웃었다. 그는 한손으로는 운전하며, 한손으로는 콘솔박스를 뒤졌다.
 "주원이 이거 써보라고 해."
 그의 검정색 선글라스였다. 주원이가 선글라스를 쓰고 차창 밖을 내다보다, 선글라스를 올렸다 내렸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연신 바빴다.
 "그거, 아이비에커 삼촌이 주원이한테 주는 선물이라고 말해줘."
 "그래. 고마워. 주원아. 이거 아이비에커 삼촌이 주는 선물이래. 감사합니다 그래야지."
 다시 침묵이 흘렀다. 타슈켄트는 의외로 작다. 도심의 끝에서 출발했는데 15분도 안 걸려 호텔 근처인 쵸르수 시장이 멀리서 보였다.


 아이비에커가 킁하고 목을 가다듬었다.
 "은주"
 차창밖을 바라보던 내가 룸미러로 아이비에커를 보자 아이비에커가 말을 시작했다.
 "너 내일 아이를 엄마한테 맡기고 혼자 나와.(明天你把你儿子托给我你妈一个人出来好吗)"
 순간 나는 내가 문장을 잘못 알아들은게 아닌가 싶어 미간을 세웠다. 혼자 나오라니, 물론 오늘 밥먹을 때 주원이가 화장실에 가는바람에 대화를 다 못 끝내긴 했지만, 혼자 나오라니 그게 무슨 말인가. 게다가 내가 말하지 않았나. 우리 엄마가 아프시다고, 아프셔서 엄마는 온전히 호텔에서 쉬게 하고 내가 홀로 아이와 나온거라고. 유아차를 밀고 시내관광을 나온 나에게 그게 할 소리인가.
 "어?(嗯?)"
 못 들은 척 하니 그가 다시 말했다.
 "내일 혼자 나오라고. 1시 어때?(明天下午1点一个人出来好吧)"
 나는 차창밖을 바라보며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가 룸미러로 나를 못 봤나 싶어 룸미러를 쳐다보자 그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비에커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왜?(为什么)"
 "그건 안돼. 그건 니 와이프에 대한 예의가 아니야.(这样不对。对你的老婆完全不礼貌的)"
 그의 목소리에 약간의 화가 섞여 있었다.
 "잠깐 나올 수 있는거 아냐? 왜 안 되는데.(出来一会儿不行么。哪里不对)"
 나는 룸미러를 정면으로 응시하며 말했다.
 "너랑 나랑 둘이 만나서 뭐하니?(咱俩见面要干嘛)"
 "대화, 산책, 식사(聊天散步吃饭)"
 나는 고개를 다시 가로젓고는 말없이 차창밖을 바라보았다. 아이비에커가 더이상 추궁하지 않았다. 긴 침묵이 이어졌다.
 할 말이 있다면 주원이랑 같이 만나 할 수도 있는 거였다. 굳이 둘이 만나자니. 차에서 당장이라도 내리고 싶었다. 위험할 때 여자가 느끼는 직감 같은거였다. 어두컴컴한 골목길을 혼자 걸을 때, 뒤에서 누군가가 따라오는 듯한 발소리를 듣게 되었을 때, 산에서 혼자 걷다 갑자기 길을 잃었을때 느낄 수 있는 직감과 비슷했다. 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호텔 앞 차에서 내리면 다시는 아이비에커와 보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15년 전 난징에서 아이비에커와 헤어질 때 나는 스스로 다짐했다. 내 인생에 아이비에커라는 이름은 모두 지우겠노라고. 어떠한 여한도 없다고. 그 일말의 여한 없는 헤어짐이 어떤 거였는지 문득 생각이 났다.
 호텔 앞에 도착하고, 트렁크에서 아이비에커가 유아차를 내렸다.

 "이 유아차 덜렁거리는게 문제라는거지? 주원아. 이거 누가 그랬어? (웃음) 너희 엄마가 고장내트렸지?"

 아이비에커는 중국어로 주원이를 보면서 말했다.

 "이거 유아차 지붕 고장난거 이렇게 떼고 다녀. 그럼 되겠네."

 아.. 맞다. 우리가 재회하게 된 건 내가 유아차 수리할 곳을 물어서였다. 어디 유아차 고장난 부분 수리할 곳이 없냐는 물음에 아이비에커는 문자로 말했었다. '오기만 해. 다 내가 알아서 할게.' 그 문자를 받고 타슈켄트 오는 기차에서 얼마나 든든했던지... 같은 애기 아빠로서 왠지 도움 받을 꺼라 기대한 내가 잘못이었다.

 차에서 내린 주원이의 한 손에 아이비에커의 선글라스가 들려있었다. 나는 유아차를 정리하며 쿨한 척 웃으며 작별을 고했다.
 "점심 고마워. 잘가. 고생하고.(谢你今天请客。去辛苦吧)"
 아이비에커가 운전석에 타고 미러를 내리고 큰 목소리로 말했다.  
 "내일 1시야. 우리 약속한거야.(明天1点咱们一言为定啦)"
 나는 미간을 찌뿌리고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가 고함을 지르듯 말했다.
 "내 와이프를 만나기 전에, 이미 너가 있었잖아.(我跟她在一起之前,你已经有了。)"
 그 얘기를 남기고 아이비에커의 차가 사라졌다. 나는 그의 마지막 고함을 듣고 나의 직감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신하게 되었다. 마지막 멘트가 아니었다면 나도 헷갈렸을 것이다. 주원이 없이 더 나랑 지난 날의 회포를 대화로써 풀고 싶은데 내가 오버해서 경계한다고 오해했을 수도 있었다.
 숙소에 도착하자 엄마가 방에서 기침을 콜록콜록하며 누워있었다. 니가 나를 사랑했다면, 정말 좋은 친구로 생각했다면, 너도 아이가 있는 아빠로써 아이들에게 느끼는 부성애가 조금이라도 있다면, 병든 엄마와 작은 아이를 데리고 이런 낯선 나라를 고군분투하며 여행하는 나에게 혼자 나오라고 할 수 있을까?

 중앙아시아 와서 내가 진짜 별 겪지 않아도 될 일을 다 겪는구나. 당장이라도 귀국하고 싶었지만, 지난 날 회피한다고 일이 모두 해결되는 건 아니라는 걸 알기에 나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내가 무엇을 해야 타슈켄트와 아름다운 이별을 할 수 있을지 생각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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