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비에커에게 마음을 열게 된 건 한낱 소시지 때문이었다. 15년 전 여름, 나는 외국인 기숙사 앞에 주차되어 있는 대형버스에 올라탔다. 이미 우즈베크 친구들끼리 얘기를 다 해놨는지 아이비에커의 옆자리가 비어있었고, 아이비에커가 자신의 옆자리를 툭툭 치며 나를 불렀다. 나는 기웃기웃 대다가 아이비에커 옆에 앉았다.
중국 지방정부 관광청은 지방도시 홍보의 일환으로 막 개발이 완료된 관광지는 외국인들을 대거 초청해서 관광을 선보이는 프로젝트를 하고 있었는데, 외국인으로 동원하기 딱 좋은 대상이 바로 유학생들이었다. 돈은 없고, 시간은 많고, 지방정부와 연계된 학교에 연락만 하면, 무료여행을 원하는 외국인 유학생들이 어딘지도 모르고 1박 2일 무료여행버스에 올라탔다. 지방정부는 관광하는 외국인들을 사진으로 찍었고, 그 사진은 '글로벌한 관광도시'의 이미지로 소비되어 해당 도시의 관광포스터에 이용되는 것이다. 일본이나 한국에서 온 유학생들은 여름방학때 대부분 멀리 여행을 떠났다. 나는 공부하느라 여름방학 내내 기숙사에 머물렀지만, 아이비에커나 바허처럼 중앙아시아에서 온 대부분의 친구들은 중앙아시아에 비해 비싼 중국에서 생활비를 아끼느라 기숙사에 머무르고 있었다. 어느 화창하던 날, 나는 홀로 기숙사방에 틀어박혀 고급 HSK문제집을 풀고 있었다. 아이비에커와 바허가 내 방으로 찾아와 산책을 가자고 하더니, 무료여행정보 들었냐면서 당장 내일 출발이라고 같이 가자고 했다. 시험이 코앞이라 생각은 해보겠노라고 말했다. 그 날밤 평소 알고 지내던 한국 유학생 오빠가 내 핸드폰으로 전화와서 동일한 무료여행정보를 알려주며 같이 가자고 했다. 거진 대부분의 한국유학생들이 기숙사에 없었기 때문에, 그 오빠도 무료여행을 중앙아시아 유학생들에 둘러싸여 거의 혼자 참가해야 할 위기였다. 2번이나 무료여행권유를 받은 나는 알겠노라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다음 날, 그 오빠가 접수한 그 무료여행에 참가하기 위해 버스에 올라탔을 때, 빈자리가 2개였다. 그 오빠의 옆자리, 그리고 아이비에커의 옆자리. 둘 다 나를 바라보고 인사를 했다. 그 오빠는 오랜 유학생활로 인해 한국인만 만나면 말이 매우 많은 타입이었는데, 자기의 말을 들어줄 유학생 후배들이 나타나면 밥과 맥주를 사 먹이며 갈망하던 한국말로 수다를 떨었다. 한 번은 그 오빠가 불러서 나간 호프집에서 유진언니와 나는 새벽 6시까지 맥주 한잔과 함께 그 오빠의 수다를 들어준 적도 있었다. 버스에 올라타 그 오빠와 눈이 마주친 순간 나는 1박 2일 동안 그 오빠의 수다를 들어준다고 생각하니 아찔했다. 그렇게 나는 무료여행에 내 이름을 접수해 준 그 오빠의 눈길을 피하고 아이비에커 옆자리에 앉았다. 지금도 이 기억이 나를 물고 늘어지는 걸 보면, 그때 내가 했던 배신이 나도 어이가 없고 참 버르장머리도 없었다. 아이비에커 역시 말이 많은 타입이긴 했는데, 그날은 조금 긴장했는지 농담을 아꼈다. 버스가 출발하자 아이비에커는 자신이 슈퍼에서 사온 간식들을 하나 둘 풀기 시작했다. 내가 멀미 및 피곤으로 인해 졸다 깨다를 반복하자, 아이비에커는 하얀 비닐봉지에서 한국의 천하장사 소시지 모양의 어육소시지를 꺼내 나에게 건넸다. 평소 소시지를 먹어본 적이 없는 나는 소시지의 포장을 벗기는데 서툴렀다. 소시지의 비닐을 밀봉하는 둥근 철사가 아무리 입으로 잡아당겨도 순조롭게 떨어지지 않았다. 결국 소시지는 엉망진창으로 포장이 으스러졌다. 아이비에커는 조용히 새로운 소시지를 꺼내서 포장을 쉬이 뜯고는 새 소시지를 나에게 건넸다. 그리고 내가 입으로 물고 뜯어 포장이 엉망이 된 소시지를 가져다가 포장을 벗겨내고는 먹기 시작했다. 내 침이 묻었을지도 모르는데... 남과 나의 경계가 확실했던 23살의 나로서는 아이비에커의 행동이 충격적이었다. 내 침을 더러워하지 않는 아이비에커, 내가 엉망으로 만들어놓은 소시지를 수습해서 먹는 아이비에커... 나를 남으로 생각하지 않아서일까. 지금의 아이비에커는 나와 사회적 거리 두기를 하는데 줄곧 실패했다.실패한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오해는 오해를 낳고 엄마가 진료를 보는 한방병원을 벗어나 센트럴파크에 가서 대충 시간을 때우니 3시간이 지나있었다. 배고파하는 주원이를 유아차에 태우고 나는 와이파이가 되는 인도 음식점에 들어갔다. 인터넷을 연결해서 카카오톡으로 엄마에게 전화를 하니 엄마는 이미 진료가 끝나고 호스텔 침대에 누워있었다.
인도음식점에 있었던 우즈베크 국기 모양의 식탁 돌장식
"아이비에커 걔한테 2번이나 전화왔었어. 진료받을 때 전화가 왔는데 뭐 내가 영어도 못하고 곤란해서 그냥 끊었다." 어쩌면 예상했던 일이었다. 가뜩이나 화가 나있는 아이비에커인데, 전화를 2번이나 끊었다니 분명 내가 일부러 피한다고 생각할 것이 뻔했다. 오해는 오해를 부르고, 타슈켄트와의 아름다운 이별과 점점 거리가 멀어지고 있었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구차해지고 있었다. 아름다운 이별을 위해서 이 사태를 수습해야 한다. 텔레그램으로 문자를 보냈다. '엄마가 핸드폰을 가지고 가셔서 연락 못 받았네. 전화했었다면서. 우리는 엄마 한방병원에 모셔다 드리고 놀러 왔다가 지금 밥 먹으러 왔어.' 성질이 급한 아이비에커는 문자를 칠 엄두도 나지 않았던 모양이었는지 바로 음성메시지가 왔다. "(한숨)너 어제 그 엉망진창(乱七八糟) 문자는 뭐야. (한숨~) 너 엄마가 그렇게 아프시면 그런 한국 전통의학이 아니고, 최신 의학에 기대서 해결할 생각을 해야지. 이럴 때는 현지인의 도움을 받아야지.(应该需要当地人的照顾)(한숨)" 니 도움 필요 없다고요 하는 말에 자꾸 '현지인의 도움' 거론하는 아이비에커, 화가 나서 한숨을 푹푹 쉬어대는 15년 만에 만난 아이비에커... 좋게 좋게 끝내자고 결심한 나는 그에게 또 사과하며 그의 화를 풀 거리를 찾아냈다. '알지. 니 마음 정말 고마워. 연락 못 받아서 미안해. 화 풀어. 그리고 어제 준 니 선글라스 오늘 주원이랑 같이 쓰고 나왔어. 너한테 고마운 생각 하면서 잘 쓸게.' 아이비에커가 나의 문자를 받고는 감정이 누그러졌는지 음성메시지가 바로 왔다. "내 생각하면 나한테 바로 전화했어야지. 그럼 내가 바로 차타고 달려갔을 거 아냐. 지금 너희 어디야." 아이비에커가 또 선을 넘었다. '음. 여기 어느 식당이야. 나 혼자 집에 갈 수 있어. 너한테 폐끼치기 싫어. 걱정 마. 고생 많다.' '그래 조심해서 오고.' 아이비에커는 그 후 말이 없었다. 화난 아이비에커를 달래는데 진이 다 빠졌다. 위장마저 얼어붙은 모양인지, 인도음식점에서 시킨 비리야니(볶음밥)와 파코라(야채튀김)가 도저히 넘어가지 않았다. 주원이 몫만 먹이고 모두 포장한 채로 눅눅한 에어컨이 나오던 음식점을 나왔다.
너는 늘 화내고 나는 납득이 안 된 채로 달래고... 우리 20대와 다를 게 하나도 없네? 나는 심란했다. 엄마가 기침하는 호스텔의 그 좁은 방에 하루 종일 에어컨 쐬면서, 막장 드라마와 뮤직비디오와 위장약 선전을 줄창해대는 우즈베크 TV를 볼 생각 하니 깝깝했다. 심란할 때는 걷는 게 최고다. 센트럴파크부터 초르수바자르까지 타슈켄트 중부를 관통하여 걷고 또 걸어 차 타고 10분 거리를, 2시간 걸려 호스텔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저녁이었다. 호스텔에 들어가자마자 친정엄마가 사놓은 야채를 가지고 나는 부엌으로 갔다. 샐러드와 된장국을 만들어 엄마와 주원이의 저녁을 만들어 먹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