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부터 30살까지 엄마를 걱정하다.
“당장 귀국할 수 없어? 엄마, 결국 입원하셨어.”
전화 너머, 멀리 고국에서 애타는 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교환학생으로 막 중국에 도착한 나를 흔들어놓은 한 문장.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언니 말로는 가족이 뿔뿔이 흩어졌다고 했다. 언니는 편집기자님 댁에서 신세를 지고 있고, 엄마는 요양병원에 입원했으며, 아빠는 혼자 집을 지키고 있다고 했다. 막 중국에 온 나에게 귀국을 요청하며,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걸 암시했다.
요양병원이라니. 거긴 상태가 심각한 사람만 가는 곳 아닌가? 그렇다면 엄마는…
그때 처음으로, 엄마가 언제 돌아가실지 모른다는 생각이 현실처럼 다가왔다. 유학 생활을 이어가는 게 맞을까, 당장 돌아가야 하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하지만 교환학생 프로그램을 취소하는 건 절차도 까다롭고, 현실적인 부담도 컸다. 무엇보다 내가 귀국한들,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엄마의 암은 이번이 세 번째였다.
30대에는 자궁암으로 자궁을 적출했고,
40대에는 유방암으로 유방을 절제했고,
50대에는 결국 뼈로 전이됐다.
청소년 시절 내내 아빠는 딸들에게 “엄마를 위해 살아야 한다”고 당부했다. 엄마가 아프고,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 아빠는 우리를 위해 훈계한 것이겠지만, 그 말은 어린 내게 너무 무거운 불안을 심어줬다. 대학생이 되어서도 그 불안은 나를 지배했다.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에 자격증을 따야 해. 돈을 벌어야 해. 엄마에게 희망이 되어야 해.’
그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초조하게 살았다.
다행히 엄마는 그 해 요양병원에서 1년을 버텨냈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셨다. 하지만 암은 사라진 게 아니라 잠시 멈춘 것뿐이었다. 나는 여전히 ‘4기 암환자의 딸’로서, 늘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그 불안은 내 에너지가 되었다. 그 결과, 문과대 졸업생으로 취업난 속에서도 대기업에 입사했다. 남들이 보기엔 꽤 괜찮은 삶이었다. 원하던 목표들을 착착 이뤄내며 성공가도를 달리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하지만 내 목표를 향한 동기는 불안이었다. 긍정적인 희망이 아닌, 공포와 책임감이 나를 움직였다. 내면은 점점 썩어갔다.
부모님에게 나는 ‘대기업에 다니는 딸’이었다.
이름보다 직함으로 불리는 딸.
“박대리, 잘하고 있지?”
“아이고, 우리 박과장. 회사는 괜찮은가?”
내가 원한 일이 아니고, 때로는 너무 벅차 도망치고 싶어도, 그런 부모님 앞에서 ‘그만두겠다’는 말을 꺼낼 수 없었다.
결혼 전까지 부모님과 함께 살며 매달 150만 원씩 생활비를 드렸다. 부모님 입장에서는 안정적인 딸의 수입이 큰 버팀목이었을 것이다. 엄마의 건강도 언제까지 괜찮을지 몰랐고, 그 역시 나를 붙잡았다.
부모님이 행복해할수록, 나는 더더욱 회사를 관둘 용기를 낼 수 없었다.
내가 원했던 직무도, 회사도 아니었지만, ‘자랑거리’라는 무게는 쉽게 내려놓을 수 없었다.
결혼 후에는 상황이 조금 달라졌다. 생활비를 드리기 어려워졌지만, 엄마의 건강은 여전히 나의 가장 큰 걱정거리였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나는, ‘대기업 직장인’이라는 정체성을 받아들였다. 당초 원하던 꿈도 아니었고, 그만두고 싶은 생각에 책상정리도 여러번 했지만 결국 나는 대기업 직장인으로 남기로 했다. 모두가 원한다면, 그 모습은 어쩌면 괜찮은게 아닐까.
불안은 계속 나를 몰아세웠고, 나는 점점 초조하고 불면에 시달렸다. 불안한 만큼 열심히 했기에 회사에서는 꽤 큰 프로젝트까지 맡게 되어 유럽을 오고 가게 되었다. 유럽에 다니며 좋은 호텔에 묵는 딸을 부모님은 더욱 자랑스러워 하셨다.
그러다 결국 몸이 망가지기 시작했다. 충농증으로 볼의 통증이 심할 때도 있었고, 어느 때는 유럽 법인에서 교육을 진행해야 하는데, 성대가 부었는지 목소리가 쉬어 아예 나오지 않았다. 유럽에서 유럽시간으로도 일하고, 숙소에서는 한국시간으로도 회의를 하다보니 불면증은 점점 심해졌다. 아무리 좋은 5성급 호텔에 묵어도 행복은 커녕, 숨이 막혔다. 게다가 갑질하는 지주사 사람들을 상대하다보니 당장에 때려치고 싶었다.
"우리 박과장, 정말 대단하네. 유럽도 다니고 말야."
귀국해서 친정에 밥먹으러 가면, 출장 그게 뭐라고 얼마나 자랑스러워 하시는지... 때려치고 싶은 마음이 쏙 들어갔다. 아이러니하게도, 엄마의 건강은 점점 좋아졌고, 내 얼굴빛은 점점 어두워졌다.
도저히 견디기 힘들었던 어느날, 나는 도피를 선택했다. 임신만이 살길이었다.
그만둘 용기는 없었기에, 일단 쉬고 보자는 심정이었다. 휴직이라도 해야겠다는 절박한 마음.
불안이 만든 박과장.
이제는 그 타이틀을 내려놓고 싶은데, 과연 나는 그럴 수 있을까?
일단… 쉬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