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데… 어떻게 알았어?”
암 선고를 받고 회사에 휴직계를 냈을 때, 동료들이 조심스럽게 물어본 질문이다.
글쎄, 나도 정확히는 모르겠다. 하지만 어렴풋이, 내 안에 암이 존재할 수 있다는 예감은 오래전부터 있었다. 어쩌면 중국 유학 시절, 언니에게서 귀국해 달라는 한 통의 전화를 받던 그때부터였는지도 모른다. 모든 걸 내려놓고 한국으로 돌아가야 할까? 고민 끝에 나는 귀국 대신, 자격증 공부에 집중하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내가 돌아가도 할 수 있는 건 없으니까…'
마음은 무거웠지만, 현실을 택했다.
그때 유학생 기숙사는 말 그대로 '축제의 장'이었다. 각국에서 모인 청춘들이 부모의 품을 벗어나 자유를 만끽하며 연애하고, 파티하고, 매일같이 웃음꽃을 피웠다. 하지만 나만은 달랐다. 하루 종일 책상 앞에 앉아 공부했고, 기숙사는 거의 고시원처럼 쓰고 있었다. 현지 친구를 사귈 생각도, 나를 위해 뭔가를 할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가끔 집과 국제전화를 하는 날이면, 나는 눈이 퉁퉁 붓도록 울었다. 엄마는 요양병원에 계시고, 언니는 여전히 편집기사님 집에 있고, 아빠는 혼자서 적막한 집을 지킨다고 했다. 슬픔과 불안이 임계점을 넘어서자, 그때부터 이상한 통증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가슴 안쪽에서 전기가 흐르는 젓가락으로 톡톡 찌르는 것 같은 묘한 흉통이었다.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통증이었다.
결국 나는 중국 대형병원을 찾아가 유방을 짓누르는 검사를 받고, 엑스레이도 찍었다. 별다른 이상은 없다는 말에 안심은 했지만, 통증은 사라지지 않았다. 아마도 엄마의 병세를 지켜보며 암에 대한 공포가 내 몸에도 각인됐던 것 같다.
귀국 후에도 통증이 계속되어, 대형병원에서 다시 검사를 받았다. 의사의 말은 이랬다.
“흠, 이건 단순한 물혹이에요. 보통 6개월 간격으로 추이를 봅니다.”
“그럼 수술로 제거해야 하나요?”
“그럴 필요는 없어요. 크기만 잘 확인하면 되고요. 자연스럽게 사라지기도 해요. 나중에 아기 낳고 모유수유하면서 없어지기도 하고요.”
아기…
그때 나는 스물셋이었다.
물혹에 대한 처방이 '출산'이라니, 어딘가 씁쓸하고 당혹스러웠다.
‘그래, 언젠가 아기를 낳으면 이 물혹도 사라지겠지.’
그리고 10년 뒤, 나는 정말로 아기를 낳았다. 축복이라기보단, 탈출구처럼 찾아온 임신이었다. 회사를 그만둘 용기는 없었기에, 임신은 휴직이라는 유일한 선택지를 열어준 시간의 유예 같았다.
그렇게 조막만한 아기를 품에 안았다. 아기를 어떻게 다뤄야 할지도 몰랐고, 내가 정말 이 생명을 잘 키울 수 있을까 두려웠지만, 아기의 작고 조막만한 몸이 사랑 그 자체였다. 하루 종일 잠만 자다가, 배고프면 그제야 칭얼대는 아기. 젖을 물리면 살겠다고 볼이 빨개지도록 빠는 모습이 기특하면서도 안쓰러웠다.
‘나는 젖이 잘 안 나오는 엄마인가 봐.’
아기가 너무 힘들게 빠는 걸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기가 자고 있을 때면 유축기를 꺼냈다.
'미리 짜두면 아기가 배고플 때 더 힘들지 않겠지.'
하지만 유축기로 짜보면 나오는 양은 너무도 적었다. 마른 걸레를 짜는 듯한 느낌. 내 가슴은 젖이 거의 말라 있는 것처럼 보였다. 특히 오른쪽 가슴은 유독 더 적었다. 왼쪽과 비교하면 확연히 차이가 났다. 젖이 부족해서일까, 아니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