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많던 부하라 유대인은 다 어디로 갔나

부하라에서 유대인의 흔적을 찾아서

by 박수소리

부하라에서 유대인의 흔적을 찾아서
피로가 회복될 즈음 레스토랑에서 나와 부하라를 천천히 거닐다가 마드라사(신학교)의 내부만 살짝 개조한 어느 방에 사진작가의 전시실이 있는 걸 발견했다. 흑백과 컬러를 오가는 수많은 작품들은 부하라의 역사와 현지인들을 담고 있었다. 사진작가는 자신의 사진을 엽서로 만들어 파는 것으로 수익을 얻는 듯했으나, 오고 가는 관광객이 워낙 없어 보였다. 삐쩍 마른 사진작가는 관광객의 방문이 오랜만이었는지, 낯가리는 얼굴로 우리를 수줍게 반기며 우리보다 한 걸음 앞서가 불을 켜기 바빴다. 사진작가는 불을 다 켜고 나서, 막판에는 에어컨도 켰다. 부하라의 노인사진이 참 많았는데, 엄마는 자신이 노인으로 향해가는 길목이라 그런지 현지 노인 사진에 공명했다. 천진난만한 미소를 지닌 노인의 흑백사진을 한참 감상하던 엄마는 말했다.
"늙으면 다시 아이로 돌아가는 거야."

img.png 부하라 사진작가의 전시실



사진을 보다 보니 이게 웬걸, 거기에는 분명 유대인이 있었다. 중앙아시아와 유대인,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조합이었다. 알고 보니 부하라가 소련에 편입되기 전 이곳은 부하라 토후국(Buxoro amirligi)이었으며, 주요 무역로에 자리 잡은 지역 특성상 이곳에는 우즈베크인, 타지크인, 유대인 등 다양한 문화가 존재했다고 한다. 유대인이 많았던 모양인지, 아직까지도 중앙아시아 출신 유대인은 부하라 유대인이라는 고유명사로 불리고 있다고 한다.

img.png 부하라의 유대인



부하라에 많이 거주하던 유대인들은 소련시절 소련이 이민을 풀어주면서 이스라엘로 대규모로 이동했고, 소련 붕괴 후에는 미국으로 이민 갔다. 소련 해체 이후, 부하라가 신생국가 우즈베키스탄에 속하게 되었을 때, 유대인, 러시아인, 기타 소수민족들은 국가주의와 무슬림극단주의로 핍박받을까 봐 걱정하였다. 하지만 의외로 중앙아시아에서는 유대인을 향한 폭력은 발생하지 않았다. 다만, 이스라엘과 미국으로의 이동으로 한때 부하라에서 23,000명 이상 거주했던 유대인들은 이제 약 150명 밖에 남지 않았다. (출처 1, 출처 2)


역사는 흔적을 남겼다. 만 명 이상의 유대인이 부하라 유대인공동묘지(Cemetery of Bukharian Jews)에 묻혀있고, 우리는 방문하지 않았지만 라비하우스와 아주 가까운 곳에 유대인정교회회당(בית הכנסת אוהל יצחק)도 있었다. 궁금해서 더 찾아보니, 부하라 유대인의 음식은 중앙아시아의 음식에도 영향을 받았으나, 고유한 음식도 따로 존재했다. 현재 유대인이 많지 않기 때문인지, 부하라에는 유대인 음식점이 따로 없는 듯했고, 부하라 유대인의 고유 음식을 먹으려면 뉴욕에 가야 한다고 한다.


부하라 유대인과 현지노인들의 사진들을 유심히 본 엄마는 나오는 길에 사진작가의 엽서를 1장당 1달러 정도 주고 샀다. 우리 여행이 2달이나 더 남았는데 배낭여행 중에 저 종이엽서를 손상하지 않고 어떻게 한국까지 가져갈까 싶었는데, 이 엽서들은 타슈켄트 가기 전에 배낭 안에서 물에 젖고 구겨져 결국 버리게 되었다.

부하라 토후국이어서 그랬을까. 유대인이 영향을 줬기 때문이었을까. 부하라는 우즈베키스탄의 다른 도시와는 분위기가 확연히 달랐다. 일단 연못과 그를 둘러싼 나무들이 정말 많았고, 도시 계획도 아기자기한 낭만이 남아있었다. 어디를 가나 나무와 수로가 함께 공존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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