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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inger Ly Nov 01. 2020

Prologue: 피로

그들의 이름, 그들의 목소리


'anything dead coming back to life hurts"

-toni morrison-




신종 바이러스가 창궐한 후 암울한 시기를 보내고 있던 2020년 5월, 인터넷에서 한 충격적인 헤드라인을 접했습니다. 미네소타 주에서 한 백인 경찰이 조지 플로이드라는 흑인 남성을 체포하는 과정에서 그의 목을 무릎으로 눌러 사망하게 한 사건을 다룬 기사였지요. 그리고 얼마 후 그 사건이 일어났던 미네소타 주 미니애폴리스에서 I CAN'T BREATHE (나는 숨을 쉴 수가 없어)라는 글자가 새겨진 마스크를 쓴 시위자들이 모여 BLACK LIVES MATTER (흑인의 목숨도 소중해)라는 구호를 외치며 조지 플로이드를 살해한 백인 경찰의 구속을 요구하는 평화시위가 벌어졌습니다. 그와 동시에 상점을 약탈하고 경찰차를 불태우는 등의 폭력 시위 또한 일어났지요. 이를 시작으로 미국 전국에서는 여름 내내 시위가 벌어졌습니다.


1992년 로드니 킹 사건과 LA 폭동을 연상시키는 일이었습니다. 무려 30년 가까이 되는 시간이 흘렀는데도 똑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 이상했습니다. 저는 연일 폭동과 시위를 다루는 뉴스에 피로감을 느꼈습니다. 무엇이 저를 피곤하게 만들었을까요. 반복되는 흑인들의 폭동과 폭력시위였을까요, 아니면 억압, 차별, 부조리에 끊임없이 분노하고 절규해도 변하지 않는 흑인들의 피로한 삶이었을까요.


어느 날, 한 인터넷 게시판에 폭동에 가담한 흑인들의 야만적인 행위와 이기적인 행동에 진절머리가 난다며 누군가가 올린 글을 우연히 보았습니다. 작성자는 인종, 국경, 나이, 성과 상관없이 시위에 참여하고 있는 시위자들을 모두 흑인으로 보고, 왜 그들 (=흑인들)은 노예제도가 폐지된 지가 언제인데, 흑인 인권이 인정된 지가 언제인데 아직도 저러고 있냐면서 한심하다는 듯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글의 요지는 왜 그들은 더 노력하지 않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왜 더 열심히 살지 않고 왜 늘 저 밑바닥에서 게을리 뒹굴고 있냐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때 깨달았습니다. 저를 피곤하게 했던 것은 바로 미국의 흑인들의 삶과 역사를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 우리의 무관심 때문이었습니다. 인종차별의 의미를 피부색으로만 보는 우리의 너무도 단순한 시선 때문이었습니다. 또 미국 대다수의 흑인들이 태어나기 전부터 사회적 차별, 편견, 무시, 억압, 불공평함, 부당함, 그리고 부조리를 겪고 있다는 사실과 그것이 여전히 21세기 미국에서 아무렇지 않게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미국에서 시대착오적인 인종차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많은 이들이 소리 높여 말합니다. 흑인들에게도 똑같은 인권이 있고 목소리가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미국인은 백인을 뜻합니다. 흑인들이 미국을 세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텐데도 흑인들은 완전한 상태의 한 개의 단어인 American (미국인)이라고 불리지 않습니다. African-American (아프리카-미국인)으로 지칭되며 한 가지로 정의하기 힘든 애매한 상태인 "-" (하이픈)을 포함시킵니다. 미국의 주인은 흑인이 아니라고 합니다. 이방인이자 이주자이며 노예들의 후손들이라고 합니다. 약탈자이자 깡패들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권위 있는 자들, 법을 집행하는 자들, 경찰들이 앞장서서 그들의 일상을 공격하고 끊임없이 감시합니다. 그들의 피부색, 행동, 말투, 가난, 방황은 그들을 수상한 자와 용의자로 만듭니다. 한 번 용의자는 영원한 용의자가 됩니다. 한 번 범죄자는 영원한 범죄자가 됩니다. 한 번 마약에 손대면 영원한 마약 밀매자가 됩니다. 그들은 그렇게 낙인찍혀 더 방황하고 더 좌절하고 또다시 일어나 새로운 삶을 꿈꾸다가 또 한 번 낙인찍히는 피곤한 삶을 살게 됩니다. 새롭게 꾸던 꿈은 번번이 물거품처럼 사라집니다. 그런데 우리는 부러진 노와 구멍 난 배를 주고 썩어가는 연못에서 열심히 노를 저으라고 합니다. 앞과 뒤를 막아놓고 더 달리라고 합니다. 후디를 뒤집어쓰고 있으면 절도범이라고 신고합니다. 분노와 피로감을 표출하면 짐승처럼 공격한다고 합니다. 비인간적이고 악마 같다고 합니다. 그리고 숨을 못 쉬게 목을 조릅니다. 어린아이들과 청소년들에게는 미래를 살아볼 기회를 주지 않습니다. 혹여 운이 좋아 미래의 꽃이 코앞으로 다가오는 행운을 누렸다면 그 꽃에 열매도 맺기 전에 줄기를 잘라버립니다.


악순환입니다.

보는 사람도 지치고 피로해집니다.


이 곳에 제가 쓰는 글들은 그들을 추모하는 글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제가 느끼는 피로감에서 그치지 않고 그들이 느끼는 피로감은 어떤 것인지 조금이나마 공감해보고 싶었습니다. BLACK LIVES MATTER (흑인의 목숨도 소중해)라는 비폭력 시민 불복종 운동이 설립된 지난 2013년 전후부터 지금까지 일어난 사건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억울하게 죽어간 그들의 이름과 삶을 들여다보았습니다. 뉴스 기사와 칼럼, 자료영상, 다큐멘터리 영상, 재현 영상, 경찰이 지녔던 바디캠과 CCTV 영상 등 여러 자료들을 수집해서 보았습니다.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참담하고 보는 내내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들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의 목소리를 제가 대신 내주고 싶었습니다. 그들의 보이지 않는 틈 속에 들어가 그들의 들리지 않는 목소리를 내주고 싶었습니다. 그들이 다시 살아나서 그들의 죽음에 대해서 말할 수 있다면, 그들의 목소리, 생각, 감정, 반응은 어떨지 생각해봤습니다. 그것들을 잘 녹여서 전달하기 위해서는 사실에 바탕한 픽션이라는 통로를 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의 죽음을 둘러싼 팩트와 사건 수사 진행 과정과 체포 과정 등은 모두 기사자료를 바탕으로 썼고, 그 외 나머지는 픽션이라는 것을 미리 말해두고 싶습니다. 그들의 과거 모든 행적들을 옹호하거나 변호할 생각은 없습니다. 제가 수집한 자료들로는 그들의 삶을 다 알 수가 없을뿐더러 자료가 충분하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선택 뒤에는 분명 그럴만한 이유와 상황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이 곳에서는 그들의 죽음 과정에만 집중했고 더 많은 이들의 이야기를 담고 싶었지만 시간적 한계에 부딪혀 일단 9명의 이야기만 담아보았습니다.  


조사 과정에서 자주 보게 되는 이름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희생자의 유족들 뒤에는 언제나 자신의 일처럼  벗고 나서 주는 인권 변호사 Benjamin Crump Al Sharpiron 목사가 있었는데요. 그들의 목소리와 시위자들의 목소리처럼 저의 글도 변화를 이끌어내는 소리를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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