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에도 비는 온다. 따뜻한 남쪽 나라에 살았던 나는, 눈을 한 번도 보지 못한 해도 많았다. 쌓일 정도로 눈이 오는 날이면 부산의 교통은 완전히 마비되곤 했다. 스노타이어나 스노체인을 챙겨 다니는 것은 사치였다. 쌓인 눈은 털어내면 그만이지만 비는 신발을 축축하게 적시곤 했다. 겨울비를 맞으며 돌아오는 날에는 차라리 눈이 왔으면 하고 생각하던 때도 있었다. 겨울비에 젖은 신발은 무겁기도 했지만 발끝이 너무 시렸다.
평택에 살며 눈 구경을 많이 할 거라 예상했지만 의외로 작년에는 많이 보지 못했다. 평택항은 조수간만의 차가 커서 부두와 안벽을 이어주는 다리가 있다. 안벽은 고정되어 있었지만 부두는 수위에 따라 높이가 수시로 변했다. 다리는 대부분 급격할정도로 기울어져 있었고, 순수하게 철판으로 만들어진 도교를 오르내리다가 다치는 경우가 많았다. 전투 상황은 흔하지 않으니, 어딘가를 다치면 무조건 비전투 손실이 되고, 눈길에서 미끄러졌다고 하면 눈총까지 받는 경우가 많다. 아픈데 눈치까지 보이니, 다치는 것은 모든면에서 손해였다. 그러니 눈이 오면 치우기 바쁘다. 강박적으로 치우고 쓸어야 한다.
누구에게나 라떼 한잔을 들이키며 읊어댈 옛날이야기가 하나쯤 존재한다. 나에게 사관학교 시절은 그런 진한 '라떼'중 하나다. 그 시절을 어떻게 버텼나 싶을 정도로 끔찍한 기억들이 많다. 요즘 들으면 가혹행위로 신고될 일들이 그때는 당연했고 비일비재했다. 지금 임관하는 후배나 의무복무 수병들에게 함부로 꺼내지도 못할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의 '라떼'들이다. 이런 '라떼'를 지닌 내가 팔굽혀펴기를 1개도 못하는 신병을 만났을 때 느낀 놀라움은 너무나 거대해서 한 순간 말을 잃어버릴 정도였다. 세월의 갭이 너무 크게 느껴져 그저 웃어넘기고 말았다. 그런 나에게 '사람 좋아 보인다'며 넌지시 말을 걸던 수병의 얼굴이 떠오른다. 나도 내가 무서워 못 본 척했을 뿐인데, 어린 청년에게는 고마웠던 모양이다.
관계는 사람을 이어주는 다리와 같다. 사람이 끊임없이 변하므로 관계의 기울기도 수시로 변한다. 변화되는 관계에서 미끄러져 다치지 않으려면 눈이 쌓이지 않도록 부지런히 닦고 치워주어야 한다. 관계에 쌓이는 눈이 바로 당연함, 자존심, 조급함, 아집, 라떼, 꼰대력과 같은 장애물들이다. 상대를 변화시키거나 나에게 맞추려 하기 전에 내게 존재하는 이런 관계의 장애물들부터 스스로 정리하는 것이 우선이다. 관계에서 미끄러지면 상대에게 도달하기도 전에 아픈 기억들만 남는다. 관계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관계는 어렵다며 불평하고 혼자가 편하다며 움츠러든다. 왠지 모를 외로움은 덤이다.
변하지만 변하지 않는 것들이 있다. 무의식에 새겨질 정도로 반복했던 일들은 비슷한 자극을 만나면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다. 그런 습관들을 잘 제어하지 않으면 누구나 라떼가 되기 쉽다. 지금은 '꼰대'처럼 들리기 쉬운 '옛날' 이야기들은 과거에는 현실이었고 너무나 '당연한' 것들이었다. 그때는 그게 맞다고 생각하며 살았지만, 시대가 변하다 보니 틀린 것, 다른 것, 이상한 것이 되었을 뿐이다.
나이 든 사람들은 젊은 사람을 '철없다'며 낮추어 보는 시선이 존재한다. 은연중에 젊은 층의 생각을 무시하는 오오라를 내뿜는다. 선험자의 조언은 분명 도움이 되지만, 말하는 이가 '라떼'에 늘 빠져사는 꼰대력 Lv.200의 무시무시한 사람이라면 어떤 보석 같은 조언도 달갑게 들리지 않는다. 좋은 사람의 말은 조언이지만, 싫은 사람의 말은 '잔소리'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관계를 발전시키고 싶다면 세대차이부터 극복해야 한다.
세대차이가 발생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살아온 환경이 다르고, 배우고 경험한 것들이 다르기 때문이다. 시대마다 중요시하던 도덕규범이나 장려되는 정부시책도, 교육내용도 달랐다. 베이비부머 시대에는 '하나만 낳아 잘 기르자'라고 했다가, 요즘은 인구절벽을 말하며 다자녀 출산을 장려한다. 대학교 졸업장만 있으면 취업이 보장되던 시대가 지나 지금은 석사, 박사를 넘어 '포스트 닥터'까지 요구되기도 한다. 먹을 것이 부족하던 시대를 살던 사람들에게 다이어트 열풍의 시대가 쉽게 받아들여지기는 어렵다. 그들이 보기에, 먹을 것이 넘쳐 비만이 되고, 비대해진 몸을 줄이겠다며 황제다이어트를 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불편할 수 밖에 어렵다. "저것들이 배가 불러서 그래!" 이런 말이 튀어나오는 이유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환경 자체가 너무나도 많이 변했다.
세대차이를 나쁜 것으로 인식해서는 세대간 장벽은 해결에 이르기 어렵다. 시니어가 라떼를 말할 때 청년들은 그들의 환경을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존중은 상대에 대한 인정으로부터 나오고, 상대에 대한 인정은 상대방의 세상에 관심을 가질 때 가능해진다. 시니어가 청년을 대할 때 그들도 나름의 지혜와 생각을 갖고 살아간다는 것을 존중할 필요가 있다. 아직 살아보지 못한 것을 두고 그들의 경험 부족을 탓한다면 세대별 간극은 결코 좁혀질 수 없다. 상대가 나보다 어리고 아는 것도 없다고 여기는 한, 그들의 생각이나 의견을 온전히 존중하기는 어렵다.
각자의 세상에는 그것을 형성하는 각자의 가치관, 사고방식, 태도가 있다. 그 세상은 나이가 어리거나 경험이 부족하다고 해서 부족하거나 편향되어 있지 않다. 설사 편향되어 있다고 해도 바로잡아줄 필요는 없다. 조금씩 완성되어가는 그들의 세상에서 진리는 매순간 새로운 경험들로 채워져 갈 것이다. 중요한 것은 내가 살던 세상의 정답이 그들의 세상에서도 정답일거라는 고정된 사고를 벗어나는 것이다.
피어나는 자의 세상과 마무리하는 자의 세상은 서로 다른 빛을 발산한다. 내가 살아가는 세상이 유일하다는 생각이 타인과의 조화를 깨트린다. 내 세상으로 상대를 초대하지 못하고, 상대의 세상에 함부로 침입한 불청객이 된다. 관계를 위해서는 '인정'과 '존중'이 우선이다. 나와 다른 사람과의 삶이 연결될 수 있을 때 생각의 범위는 확장된다. 내가 몰랐던 세상과도 대화를 나눌 수 있을 때 한층 더 성장하며, 세대차이를 극복할 합의점도 찾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