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트러진 의자가 그가 이미 떠났음을 내게 알렸다. 흔적은 자신을 기억해달라는 무언의 주문과 같아서 그 순간을 오래도록 반추하고 싶은 날이면 나는 그 자리를 그대로 남겨둔다. 사소한 흔적마다 한 사람의 존재와 부존재가 고스란히 묻어있다. 의자가 놓인 비스듬한 정도, 다리에서 뻗어 나온 그림자의 모양, 테이블과의 거리, 쿠션의 밀리고 눌린 모양. 마른 커피잔 자국까지. 수첩을 펼친 것은 남겨두고픈 이야기가 있어서였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막상 펜을 집어 들고 나면 한참을 그저 떠올려보게 된다. 멍한 눈길로. 허공의 어떤 점을 응시하며. 무언가를 보는 듯 하나 실은 아무것도 담겨있지 않은 눈동자로. 지금 눈앞에 거울이 있다면 내 모습은 퍽 처량하리라.
그 처량함은 아마 이런 느낌이지 않을까? 평택역 광장에서 3시간을 기다렸는데 막상 상대방은 약속을 기억조차 하지 못했음을 뒤늦게 알게 되었을 때. 스무 통이 넘는 부재중 전화를 확인하고도 밤 11시가 넘어서야 연락해서는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없이 술인지 잠인지 아무튼 무언가에 잔뜩 찌들었거나 혹은 적어도 그중 하나로부터 전혀 헤어나지 못한 음성으로 "왜?"라고 귀찮게 묻는 그를 발견했을 때. 그 황망함과 어이없음, 이어지는 분노와 끝내 감각하고 말 비참함과 처량함. 약속하고 또 새끼손가락까지 걸었던 것 같은데 그것이 상대방의 세상에서는 좁쌀만 한 점으로조차 남아있지 않음을 결국 깨닫고 말았을 때. 나는 약속을 기다리는 동안 무엇을 기대했었나. 그 두근거림과 애타던 시간들에 대한 억울함과, 이제야 드러난 그의 무심함이 실은 애써 외면해왔던 우리의 간격인 것 같아서. 나의 하루가 통째로 소매치기당한 마음에 가슴을 치며 숨이 턱끝까지 차도록 뒤쫓아도 점점 멀어지기만 하는 뒷모습.
힘겹게 끄집어낸 오늘 하루는 행복으로 가득 차 있었다. 멀찍이 보이는 구름 노을처럼 바라볼 수 있는 반짝임 속에서 때로는 따뜻했고 때로는 자유로웠던 그 그림자의 춤사위를. 불어오는 바람을 쓸어 넘기며 물끄러미 텃밭에 이제 막 심어진 모종의 잎사귀를 알아맞히던 물음표들. 서로의 이야기가 한 번은 이쪽, 한 번은 저쪽, 고민하고 때로 분개하며 걱정을 비추다가도 어느새 머쓱하게 웃는 그 무던함에 마음을 살포시 놓으며, 매우 사소하고도 개인적이나 그저 흘려듣기에는 가끔 가슴이 먹먹한 이야기들에 자연스레 귀를 기울이고 고개를 끄덕였던. 각자의 꿈이 때로는 아픔일 수밖에 없었던 과거와 현재의 어느 순간들을 마주하며, 한참이 흐르고 나서야 비로소 긴 긴 인연의 고리를 다시 하나씩 꾀어 맞추며 시간을 완성해갔던. 그 강물, 노질과 포말, 어느새 다시 떠오른 추억들. 기억의 사진첩 속에 오래도록 꽂아두기만 했던 색 바랜 사진들을 하나씩 꺼내어보며 사람이 사람을 바라보는 가장 정(情)적인 마음으로 한동안 말없이 수다스러웠던 따뜻하고 편한 그 모든 것들이. 그래서 나는 오늘의 흔적을 그대로 놓아둔 채로 가만히 수첩에 담기로 했다. 오늘을 기억해 달라는 무언의 주문으로. 삶의 수많은 페이지들 속에 오늘의 갈피를 꽂아두기 위해. 우리가 나눈 짧고 격 없는 대화가 깊은 내면을 그대로 비출 수 없었더라도 허기진 마음과, 채워지지 않는 공간과, 화석처럼 남아있던 흉터를 조금 연하게 만들었기를. 이 아무렇지 않은 하루가 어느 순간, 덮어둔 일기장 위에 문득 펼쳐져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