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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가 전우형 Feb 28. 2024

헤어지자고 했던 날

소설

  외로움이라는 이름의 공터가 있었다 

  혼자여서 외롭다고 생각했는데 

  실은 혼자가 아니어서 외로운 거였다 

  그 빈자리가 나를 위태롭게 했다

  재촉하고 일으켜 세웠다

  현기증이 활시위처럼 당겨졌고 

  나를 향해 쏘아졌다 

  나는 외로움의 정의를 다시 쓰기로 했다.      




  이 수요일은 당신에게 없을 하늘이고, 시간이 없는 자의 미련이기도 합니다. 당신은 어디쯤입니까. 바람이 나비난을 흔듭니다. 나비난이 바람에 쓸려 얼굴을 세웁니다. 장미 허브 냄새가 납니다. 나는 문을 닫습니다. 걱정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강한 사람입니다. 강한 사람의 시간은 어떻습니까. 단단하고 견고합니까. 영원불멸하고 뜨겁습니까. 나는 당신의 차가운 손을 기억합니다. 침착한 숨소리를 기억합니다. 흐트러지지 않던 앉음새를 기억합니다. 위로하기에 너무 멋진 사람. 그래서 울었습니까. 고작 한 방울, 펑펑 울지도 못하고, 그래서 울었습니까. 나를 위로조차 건넬 수 없는 못난 친구로 만들었습니까. 당신 없는 겨울에 다시 수요일을 맞습니다. 당신은 어디쯤입니까. 어디에서 눈물을 몰래 훔칩니까.   




  22. 헤어지자고 했던 날     


  아직 캄캄한 밤이다. 겨울밤은 기울지 않는다. 쪽창 외에는 미세한 빛조차 없다. 능선과 밤하늘의 경계가 선명하다. 두 세계가 만난 것처럼 구분된다. 들불이 번지듯 마음이 환해진다. 그 속에 초승달이 있다. 초승달은 서쪽으로 나아간다. 경계를 넘어 사라진다. 나는 손을 만지작거린다. 입김이 손에 닿아 하얗게 흩어지는 걸 본다. 동굴의 기침같이 덜컥거리던 자동문이 떠올랐다. 불어오던 한기가 되살아났다. 몸이 식는 걸 느낀다. 나는 약속 장소로 향하던 길이었다. 때늦은 불안. 까마귀 떼 같은 구름. 하늘과 하늘 사이를 까맣게 메우던 짙은 먹색의 구름.


  나는 차 안에 있었다. 기억을 더듬었다. 가드레일을 들이받을 때의 충격이 되살아났다. 날카로운 것이 구부러지고 찢어질 때의 섬뜩함도. 차는 오른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가슴이 뜨거웠다. 어깨는 감각이 없었다. 그대로 기절했다가 다시 눈을 떴다. 나는 차 안에 있었다. 나는 눈길을 달리다 미끄러졌다. 빙글빙글 돌던 시야가 떠오른다. 모든 것이 흐릿하게 번지던 순간이 마지막이었다. 거센 충격이 두 번 있었고 오른쪽 어깨를 무언가가 찢고 지나갔다. 피가 흘렀다. 뜨거운 피가 들불처럼 가슴에 번졌다. 벼락이 내리치며 다시 정신을 잃었다. 나는 약속 장소로 향하고 있었다. 너는 헤어지자고 한 날도 기억 못 하는구나. 시간이 없었다. 나는 늘 시간이 없었다.      


  눈이 내렸다. 그러므로 겨울일 것이다. 겨울은 이른 시간에 해가 진다. 그러므로 밤이 길다. 움직일 수 없는 오른팔 대신 왼팔을 뻗어 주차 브레이크를 당겼다. 기어를 P단으로 옮기고 다시 R단으로 옮겼다. 몇 시간 동안 시동이 걸려 있었던 걸까. 얼마나 쓰러져 있었던 걸까. 피가 굳지 않았다. 밤과 밤 사이를 가로지르는 것은 별과 달뿐. 아직 눈이 내렸다. 피처럼 붉은 눈이었다. 차는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전조등은 왼쪽만 비쳤다. 왼쪽은 산이었다. 그쪽에서 노루나 고라니가 튀어나오는 경우가 있었다. 고통은 없었다. 휴대전화를 열어 시간을 봤다. 지문 인식에 실패했고 왼손으로 패턴을 그렸다. 전화를 걸었다. 네가 말했다. 너는 헤어지자고 한 날도 기억 못 하는구나. 미안. 가는 길이었어. 거짓말. 진짜야. 목소리를 떨지 않았다. 나는 그 순간 그렇게 했다. 올 필요 없어. 네가 말한다. 안녕. 전화가 끊어졌다. 왼손을 내려놓을 수 없었다. 전화기를 떨어트렸다. 주워야 하는데. 상체를 숙일 수 없다. 주워야 하는데. 할 수 있는 건 창문을 내리는 것뿐이었다. 창문은 한 뼘쯤 내려오다 멈췄다. 뭐야. 그 고장 난 자동문 같잖아. 나는 투덜거렸다. 충분하지 않은 틈으로 공포가 밀려들었다. D단으로 바꾸고 가속 페달을 밟았다. 불길한 진동이 일며 차는 앞으로 나갔다.      


  눈이 내렸다. 하얀 점들은 어둠 속을 유영했다. 침묵이 이어졌다. 두근거리는 엔진 소리가 가늘게 이어지다가 사라졌다. 책이 쏟아지며 책갈피가 떨어졌다. 차를 세우고 책갈피를 바라보았다. ‘Freely you have received, freely give’라는 마태복음의 한 구절이 쓰여 있다. 왼손을 뻗어 책갈피를 뒤집는다. 이상의 ‘이런 詩’의 중반부 다섯 문장을 한자씩 읽어나갔다. 마음이 차분해지면서 눈이 감기려 했다. 이대로 잠들어 버릴까. 나는 중얼거렸다. 나는 책갈피를 꽂고 다시 책을 덮었다. 한동안 펼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길을 꺾어 곧장 카페로 갔다. 카페는 온기가 남아있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안온이 깃든 공기를 마시며 카운터를 살폈다. 불을 켜자 익숙한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핫팩 하나를 꺼내 왼손에 쥐고 창가로 갔다. 밖은 캄캄했다. 나는 ‘OPEN’이라고 쓰인 전광판을 켰다. 커피잔 모양의 램프에 불이 들어왔다. 노랑과 파랑, 분홍과 초록. 자세히 들여다본 것이 처음이다.      


  커피를 내리는 일은 왼손으로도 가능하다. 여전히 오른쪽 어깨를 움직일 수 없고 피가 맺힌 걸 느낀다. 익숙하지 않은 자세로 진지하게, 나는 커피를 내렸다. 기계음을 들으며 불평 없이 차오르는 황금빛줄기를 본다. 그 모습에서 한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어째서 네가 떠올랐을까. 너는 어디에 있을까. 궁금한 채로 오른쪽 어깨의 흉터를 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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