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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가 전우형 Feb 26. 2024

방파제가 내려다보이는 돌담에 서서

소설

  어떤 걸 고를까

  아주 어려운 숙제를 받은 기분이야

  너에 관한 건 

  사소한 것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은데




  20. 방파제가 내려다보이는 돌담에 서서     


  유주는 D시에서 주간보호센터를 운영한다. 키가 180cm를 넘고 각종 성인병에 시달리다가 위절제술을 받았다. 같은 시술을 받은 다른 환자들에 비해 유난히 먹지 못했고 그래서 체중 감량 효과는 더욱 좋았다. 시술을 받은 것은 작년 3월이었다. 벌써 그 후로 1년이 흘렀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유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됐다. 큰 키가 돋보였고 살갗은 메마른 나무껍질처럼 변했다. 팔다리가 전보다 더 길어 보였고 손끝이 떨렸다. 유주는 겨울 바다의 마지막이 궁금하다고 했다. 그런 거 봐봤자 아무 감흥도 없을 텐데. 유주는 나를 흘겨보았다. 아차, 밖으로 나가버렸구나. 그래서 갈 거야, 말 거야? 유주는 내게 물었다. 가기로 했으니까. 나는 그렇게 말하며 다른 쪽으로 시선을 틀었다. ‘우리 동네를 깨끗하게 바꿔봅시다’라고 파란색 글씨를 큼지막하게 새긴 재활용품 수거 차량이 비틀거리며 오르막을 오르고 있었다. 언제 출발할 거야? 

  내일. 

  갈 수 있겠어? 센터 일도 바쁘다면서.

  몰라. 갈 거야.

  유주는 잠시 사이를 두고 말했다. 

  안 그럼 내가 죽어버릴 것 같아.

  유주는 입술을 물었다. 물은 자리에서 피가 날 것 같았다.

  그래. 

  운전은 내가 할 거야.

  그래.      


  그래. 그것 말고는 달리 대답할 말이 없었다.     


  하고 많은 바닷가 중에 왜 하필 강릉이야?

  거기가 가장 머니까. 유주는 앞을 보며 말했다. 핸들에 바짝 붙은 모양새가 불안해 보였다. 부산이 더 먼데. 다행히 이번에는 이야기가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았다. 

  강릉은 아직 눈이 녹지 않았을 거야.

  오늘 돌아올 수는 있을까.

  있어. 타협의 여지를 남기지 않는 말투였다. 성에가 점점 더 짙어졌다. 나는 창문을 내렸다. 바깥에서 광폭한 바람이 불어 들어왔다. 

  속도 좀 줄여.

  응. 하지만 유주는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속도계는 130km/h를 넘어가고 있었다. 나는 그쪽을 쳐다보지 않기로 했다. 멀리 설산이 보였다. 1년 내내 눈이 녹지 않는 곳. 만년설이 만져보고 싶었다. 산꼭대기의 얼음은 다른 얼음보다 더 차가울까. 절대 0도쯤 될까. 편의점에서 산 스타벅스 라떼를 한 모금 마셨다. 속이 더 차가워지는 것 같았다.     


  한동안 유주와 나는 아무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괜히 따라온다고 했나. 후회가 들 무렵 유주는 센터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새로 옮긴 곳이 시설은 더 좋아. 어르신들도 나쁘지 않고. 일이 많아지긴 했지만 할 수 없는 정도는 아냐. 이전 센터 문제도 정리돼 가고 있고. 조리원 문제로 시끄럽긴 해. 급식 업체가 우릴 속였을 줄은 꿈에도 상상 못 했으니까. 토해낼 돈이 수천이지만 괜찮아. 그 정도는. 해결할 수 있어. 

  ...

  근데 왜 이렇게 힘들지?

  글쎄. 센터장이라는 자리가 그런 거 아닐까?

  아니. 유주는 시선을 앞에 둔 채로 고개를 저었다.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와이퍼가 움직일 때마다 눈은 자국도 남기지 못한 채 씻겨갔다. 

  나는 엄마가 힘들어.


  엄마. 나는 한동안 그 단어를 곱씹었다. 엄마가 힘들 수도 있구나. 그런 상상 같은 거 해본 적 없었다. 엄마 같은 분들을 모시던 유주가 엄마 때문에 힘들다는 말이 비현실적으로 들렸다. 나는 유주의 엄마를 만난 적이 없었다. 전화기 너머 목소리로 몇 번 접했을 뿐. 마산 사투리가 강한 분이었다. 목소리가 꼿꼿해서 80세가 다 된 분 같지 않았고 그래서 더 고집스럽게 들렸다.      


  대관령 휴게소는 가슴까지 눈이 차 있었다. 간신히 차 한 대 지나갈 정도의 폭으로 제설된 길을 따라 휴게소로 들어갔다. 쌓인 눈을 이기지 못하고 부러진 나무가 마음을 착 가라앉게 했다. 입구만 간신히 드러난 공용 쓰레기 수거함과 눈에 파묻혀 형태만 유지하고 있는 전기차 충전소 역시도. 유주는 어묵탕 하나를 손에 든 채 차에 탔다. 호수에 비친 달을 보듯 종이 용기 한가운데를 쳐다보는 유주에게 나는 물었다. 먹을 수 있겠어? 응. 유주는 다짐하듯 고개를 끄덕인 다음 어묵 국물을 마셨다. 와! 맛있어! 이제 속이 좀 풀릴 것 같네. 유주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나도 떡꼬치를 한입 베어 물었다. 아직 강릉까지는 한 시간을 더 달려야 했다.      


  경포해수욕장은 온화했다. 바람이 없고 바다는 겨울과 어우러질 만큼 어두웠다. 파도가 쳤고 수평선 위로 드문드문 배가 지나다녔다. 유주와 나는 짙눈깨비를 맞으며 해변을 걸었다. 하얀 모래사장 위로 발자국들이 남았다. 누군가 만들어 둔 눈사람 옆에 서서 바다를 바라보았다. 역시 좋은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눈사람을 만든 사람도 이 파도 소리를 들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자 문득 얼굴도 모를 그 사람이 친근하게 느껴졌다. 유주는 어느덧 해변 끝에서 돌아오고 있었다. 해변의 나무들처럼 한쪽 어깨와 머리에만 눈이 쌓인 채로.


  근처에 도깨비 촬영지가 있대. 거기만 보고 가자.

  유주는 다시 차를 몰았다. 해변을 따라 난 도로를 달렸다. 바다가 멀어지다가 다시 가까워졌다. 

  저기야. 유주가 손으로 바다 쪽을 가리켰다. 몇 사람이 서 있었다. 작고 볼품없는 방파제 앞에 ‘도깨비 촬영지’라는 팻말이 서 있었다. 

  안 내릴 거야?

  응.


  나는 차에서 내려 방파제 쪽으로 걸어갔다. 바다가 발에 닿을 것처럼 찰랑거렸다. 출입 금지 테이프가 한쪽으로 밀려 있었다. 나는 방파제가 내려다보이는 돌담에 서서 안으로 들어간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경찰 순찰차 한 대가 지나갔지만 그들을 향한 제지는 없었다. 빨간색 테이프가 마치 도깨비는 이제 끝났어, 하고 말하는 것 같았다. 서둘러 차에 탔고 우리는 다시 출발했다. 내비게이션의 도착 시간은 밤 아홉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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