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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가 전우형 Feb 25. 2024

인간은 모두 꿈을 꿔, 다만 기억하지 못할 뿐이지

소설

  마음이 닳아서

  주파수를 새로 맞춰야 하는 나지만

  너를 배웅하던 순간만큼은

  천천히 잊고 싶어

  아끼는 신발을 신을 때처럼

  아주 조심스럽게




  19. 인간은 모두 꿈을 꿔, 다만 기억하지 못할 뿐이지    


  잠이 안 와? 

  아내가 혼곤한 눈으로 침대를 빠져나오는 내게 물었다. 

  응. 잠깐 바람 쐬고 올게.

  몇 신데 지금? 


  아내는 누운 채로 휴대전화를 열어 시간을 확인했다. 아내의 얼굴이 환해지는 걸 보며 나는 방문을 닫았다. 찰칵. 최대한 조심스럽게 문을 밀었음에도 밤을 자르는 듯한 파열음이 났다. 누구든 단숨에 잠이 달아나 버릴 것 같은 소리였다. 아니나 다를까 안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카디건을 걸친 아내는 거실로 나와 식탁 의자에 엉덩이를 걸쳤다.


  밖에 영하 8도래. 따뜻하게 입고 나가. 

  그래.

  아내는 나를 잠시 쳐다보다가 정수기로 가서 물을 마셨다. 그리고 찰랑찰랑하게 채워진 물컵을 내게 내밀었다. 

  엄청 시원해.


  아내의 말대로였다. 나는 무엇보다도 갈증에 시달렸음을 느꼈다. 나는 잔을 내려놓고 겨울에만 입는 암녹색 패딩을 걸쳤다. 아내는 어느새 방으로 들어가고 없었다. 다시 한번 찰칵.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아내는 내가 돌아올 때까지 잠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아내는 스킨십을 통해 안도감을 얻는 타입이었다. 아내는 혼자 자는 날이면 꼭 악몽을 꿨다. 죽은 사람의 손을 잡고 뛰는 꿈. 해부학 실험실에 갇혀 밤을 새우는 꿈. 시체를 자르다 솟아오르는 피를 온몸에 뒤집어쓰는 꿈. 잘린 다리에서 흘러나온 피가 얼굴로 차오르는 꿈. 그토록 선명한 꿈을 나는 경험하지 못했다. 나는 무언가에 쫓기거나 높은 곳에서 떨어지거나 더 이상 곤란할 수 없을 만큼 곤란한 상황들이 연이어 터지는 그런 종류의 꿈을 꾸었다. 그리고 대개는 꿈을 꾸지 않았다. 인간은 모두 꿈을 꿔. 다만 기억하지 못할 뿐이야. 아내는 단정하듯 그렇게 말했다. 그런가.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내가 기억하지 못하면 그걸 꿈으로 부를 수 있나? 기억이 전혀 없는데도 그 일을 겪었다고 할 수 있나? 그런 질문들을 속으로 했다.     


  살과 살이 맞닿을 때 꿈의 골조를 형성하는 핵심 정보들이라도 교환되는지, 아내는 나와 함께 잘 때면 악몽을 꾸지 않는다고 했다. 나는 어릴 때부터 누군가와 마주 보고 잠든 경험이 없었다. 아빠는 집에 없었고 엄마는 등을 돌리고 잤다. 간혹 아빠가 함께 잘 때면 엄마는 다른 방으로 갔다. 집이 좁아져 다른 방이 없을 때는 부엌에 이불을 깔고 잤다. 아빠는 코골이가 심했다. 엄마는 소리에 예민한 사람이었다. 나는 엄마의 얇은 면티를 만지작거리는 것을 좋아했다. 하도 빨아 면이 부들부들해진 그 티셔츠는 곱슬머리처럼 보풀이 일어 있었다. 엄마가 모로 누우면 티셔츠와 몸 사이에 공간들이 있었고 나는 엄마의 살이 닿을 때까지 손가락으로 옷을 꾹꾹 눌렀다. 엄마는 상관하지 않았다. 그러다 가끔 부르르 떨며 웃었다. 내 손을 곱게 치우며 엄마는 묻곤 했다. 왜, 잠이 안 와? 그리고 돌아누워 나를 꼭 안아주었다. 그러면 엄마 냄새가 났다. 나도 그렇게 누군가의 품에서 잠들 때가 있었다.      


  현관문을 열자 삐걱하는 소리가 들렸다. 복도의 한기는 바깥보다 짙었다. 2주 전부터 엘리베이터 교체가 진행 중이었다.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동작감지센서가 달린 어두침침한 조명은 켜지고 꺼졌다. 층계참에 서면 높은 창문 밖으로 붉은 십자가가 보였다. 이렇게나 많았나.      


  어째서 밤길을 걷고 싶었는지. 어쩌다 잠이 달아났는지. 그런 질문들에는 대개 답이 없다. 천천히 304개의 계단을 걸어 1층에 도착했을 때 나는 덜컹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자동문이 닫히지 못하고 열림과 닫힘을 반복하고 있었다. 내가 다가가자 자동문은 열린 상태를 유지하다가 닫혔다. 그리고 끝까지 닫히지 못하고 다시 열리기를 반복했다. 찬 바람이 불어왔다. 갑갑하던 가슴이 서늘해졌다. 나는 하늘을 보고 걷다가 발을 헛디뎌 미끄러졌다. 고통은 없었다. 이마 위로 눈송이들이 떨어졌다. 하얀 궤적이 이지러지며 눈을 어지럽혔다. 새벽이었고, 살아있는 생명체는 없었다. 달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하현이 동남쪽을 겨누고 있었다. 달빛이 하늘이 구름으로 가득 차 있었다는 걸 알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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