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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가 전우형 Feb 27. 2024

쓸고 닦고 정리하는 그 일

소설

  저...

  나는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처음 보는 여자가 까만 우산을 내게 내밀고 있었다

  지난번엔 감사했어요

  아... 그때 그. 집에는 잘 들어갔어요?

  네, 덕분에. 그런데 비는 안 왔어요

  하지만 정말 큰 도움이 됐습니다

  그녀는 고개 숙여 인사하고 사라졌다

  아... 네

  나는 고장 난 인형처럼 서 있었다




  21. 쓸고 닦고 정리하는 그 일     


  바닥을 쓸면 보이지 않던 먼지들이 보인다. 마치 그동안 보이지 않던 사람이 눈에 들어오는 것처럼. 사람을 알아보는 데는 먼지만큼의 시간이 필요한 모양이다. 시간을 모으고 모으면 만들어지는 한 사람. 옆에 이미 존재했던 한 사람. 수 없이, 이곳의 먼지 알갱이 개수만큼 마주치던 한 사람. ‘우리’의 누적은 시간이 만들어 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먼지를 모아 담는다. 테이블 아래 구석구석 쌓인 먼지와 의자를 이리저리 밀며, 계단 모서리를 쓴다. 겨울의 시간만큼 먼지는 쌓였다. 오래전 잃어버렸던 그림이 엽서의 뒷면으로 돌아오고, 나는 오른쪽 아래에 연도와 날짜를 썼다. 아쉬움을 담은 눈동자가, 기다림을 미루던 입술이, 한숨에 내려앉던 심장이, 거기 있었다. 나는 그 그림을 책갈피로 썼다. 소나무 숲과 군청색 하늘과 별처럼 노란 십자가 모양의 꽃밭. 그곳을 거닐던 우의 차림의 정령들. 그것은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 ‘노르웨이의 숲’의 한 장면이었다. 그 장면은 내게 박제가 되었다. 그러나 그 숲이 가리키는 장면이 무엇이건, 눈앞에 펼쳐진 그림은 또 다른 오리지널이다. 나는 그림의 주인을 알고 엽서가 날아온 경로를 안다. 이제 나는 덮은 페이지를 기억하는 대신 한 장의 엽서를 그곳에 끼워둘 수 있게 됐다. 책을 펼치면 숲이 먼저 보인다. 마치 다른 곳에 있는듯한 느낌이 든다.      


  카페라는 한정된 공간을 나는 떠날 수 없다. 시곗바늘처럼 한 곳을 중심으로 회전운동을 한다. 답답하다고 느끼지 않았다. 다만, ‘다만’이라는 생각이 가끔 들뿐이었다. 그런 날이면 찾는 장소가 있다. 차가 거의 다니지 않는 한적한 도로. 성묘가 깔끔하게 된 일곱 개의 봉분과 세 개의 비석. 녹슨 컨테이너. 길의 만곡부에 형성된 차 한 대가 간신히 들어설 만한 공간. 그곳에 차를 세우고 전조등을 끄면 사방이 어둠에 잠긴다. 완벽한 어둠이라기엔 손색이 있지만 적어도 도시의 서툰 밤보다는 훨씬 선명하다. 하지만 선명한 밤이란 어떤 형태일까. 내가 내게 묻는다. 그곳에서는 그런 질문이 가능하다.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누구의 눈빛도 나를 흔들지 않는. 눈을 감고 있으면 소리가 들린다. 맹꽁이 울음처럼 입을 막은 채 비명을 지르는 것 같다. 소락소락 풀잎이 바람을 쓸고, 오래된 알루미늄 창틀이 긁히는 소리가 날카롭다. 나는 혼자가 아님을 느낀다. 영혼의 합창이 설핏 들었던 잠을 깨운다. 눈을 뜨고 옆을 바라보면 찬란한 밤빛 아래 홀로 선 나무 한 그루가 있다. 나무와 나는 서로를 본다. 안부를 묻는다. 잘 지냈어? 오늘은 어땠어? 괴롭히는 사람은 없었어? 바람이 없어 좋았어. 걷기 좋은 날씨야. 밤은 무섭지 않았어? 인간들보다는 나아. 나도 인간인데? 아니. 너는 낙엽이야. 오래전에 진 낙엽. 그건 슬픈걸. 낙엽을 모으는 사람을 찾아. 그런 사람이 있을까? 있어. 그래, 그런데 잎은 아직이네. 벌써 2월인데. 이상해? 아니. 없는 것도 좋아. 때를 기다려야지. 응. 이제 가. 그래, 가야지. 안녕. 안녕.     


  시간의 지문을 채취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 나무는 그럴 필요가 없다. 나이테가 스친 시간을 담아두므로. 하지만 나이테를 보려면 잘라내야만 하지. 인연도 그럴까. 자른 다음에야 얼마나 많은 시간을 서로에게 담아왔는지 깨닫게 될까. 헐벗은 나뭇가지 같은 인연이 실은 가장 아름답고 편안했다는 걸 알게 될까. 나는 잎이 무성히 돋아난 마음으로 너를 안고 싶어. 어쩌면 그런 순간은 영영 오지 않을지도 모르지. 그래서 또 쓸고 닦고 정리하고. 먼지 속에서 사금 같은 시간을 모아 녹이고 정제하고. 아주 작은 의미를 찾아 오역하고, 윤색하고, 혼합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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