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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가 전우형 Mar 01. 2024

별일도 아닌걸요

소설

  기계는

  정확하고 불평불만이 없고 

  자기 주관을 내세우지 않고 

  절차대로 작동하면 

  결과물을 만들어낸다 

  인풋과 아웃풋이 정직하다 

  고장 날 때까지 쉬지 않고 일한다

  나는 기계가 되고 싶었다  




  23. 별일도 아닌걸요


  카페 손님 중 기계를 닮은 사람이 있었다. 몇 마디 나누지 않고도 우리는 친구가 됐다. 무슨 사람이 하루 종일 그렇게 일만 해요? 어느 날 그 친구(편의상 D라고 하자)가 내게 물었다. 의외로 할 게 많거든요. 나는 쇼케이스 바닥을 닦으며 말했다. 손님도 별로 없구만. D는 마치 자신은 손님이 아닌 것처럼 투덜거렸다. 일은 원래 손님 없을 때 하는 겁니다. D가 대답하지 않자 나는 비로소 고개를 들고 카운터 밖을 내다봤다. D는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나를 보며 웃었다. 언젠가 한 번 말을 걸 거라고는 생각하고 있었다. D는 혼자서 너무 오래 카페에 앉아 있었다. 무얼 좋아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매번 주문하는 메뉴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아포가토는 언제 돼요? 겨울에는 안 해요. 지난번에 투게더 사다 준 거 다 썼어요? 네. 짤그랑. 종소리가 들렸고 D는 밖으로 나갔다. D는 잠시 후 투게더 하나를 들고 나타났다. 그리고 카운터 안쪽으로 말도 없이 들어왔다. 여기는 직원만 들어올 수 있는데요. 가시 돋친 말투에도 D는 물러서지 않았다. 스쿱으로 투게더를 공처럼 떠서 차곡차곡 담으며 말했다. 뭐해요? 어서 에스프레소 안 내리고? 아이스크림을 담는 모양새가 처음 해보는 사람 같지 않았다. 뭐예요, 이런 데서 일해봤어요? D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에스프레소 머신 앞으로 왔다. 어디 내리는 것 좀 봅시다. 2구 머신이네. 오, 청소도 열심히 하나 봐요? 나는 처음 카페를 맡았을 때의 기분이 들었다.      


  친구라고는 하지만 이름도 모르는 사이였다. 그 친구는 오래된 감색 세단을 타고 나타났다. 중고차치고 겉은 깨끗한 편이었지만 뒷바퀴 펜더가 내려앉은 게 흠이었다. 청바지나 롱스커트를 즐겨 입었고 상의는 품이 넉넉한 맨투맨 티셔츠나 니트 스웨터를 걸쳤다. 스카프를 두를 때도 있었지만 대개는 목이 드러난 차림이었다. 20년 전 폐병을 심하게 앓았고 천식이 심했다. 가방에는 늘 기관지 확장제가 들어 있었다. 전화를 받을 때만 부산 사투리를 썼다. 핸드크림을 챙겨 발랐고 얼굴에는 화장기가 없었다. 나이는 40대 초반. 물론 추측이다.      

  D와 알게 된 것은 커다랗고 까만 개 한 마리 때문이었다. 이 동네에는 논밭이 대부분이기는 하지만 군데군데 공장이나 창고형 건물들도 자리 잡고 있다. 반품된 물건을 할인해서 판매하는 상점이나 고철 수거 업체, 택배 회사의 중간 거점, 지적 장애인들이 일하는 사회적 기업 등이 그런 건물에 입점해 있다. 유동 인구가 많지 않고 인적이 드문 곳이라 밤이 되면 어둡고 불 켜진 곳이 거의 없다. 유일하게 환한 곳은 근처 미군 부대 군인들이 사는 렌털 주택들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대부분 크고 작은 개 한 마리씩은 키운다.     

 

  코로나가 한창이던 2022년 7월, 나는 길을 가다 펼쳐진 우산 하나를 발견했다. 검은색 골프 우산은 사람 하나를 가릴 만큼 컸는데 하늘이 아니라 정면을 향해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그 우산에서 2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개 한 마리가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커다랗고 까만 개였는데 털이 짧고 주둥이는 길고 다리가 늘씬했다. 벌어진 입 사이로 혓바닥이 늘어져 있었다. 목줄이 끊어진 채로 걸려 있었다. 이 부근에선 흔한 일이다. 조금 더 다가가자 커다란 우산 아래로 발 한 쌍이 보였다. 저리 가, 저리 가라고. 우산이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애원하고 있었다. 까만 개는 나를 잠시 쳐다보다가 천천히 물러서더니 길을 건너 사라졌다. 까만 우산은 개가 사라진 것도 모른 채 서 있었다. 나는 기다리다 못해 우산에 노크했다. 저, 이제 갔어요. 네? 커다란 우산이 바들바들 떨리며 옆으로 살짝 기울었다. 그곳으로 단발머리와 눈이 나왔다. 갔다고요. 네? 개요, 개. 눈동자가 흔들리더니 우산이 착 하고 접혔다. 터지기 직전의 꽃봉오리처럼 서 있던 여자는 긴장이 풀린 듯 무어라고 소리쳤다. 알고 보니 걸쭉한 욕이었다. D는 어깨가 축 처진 채로 뒤돌아서 걸어가더니 카페 쪽으로 갔다. 나는 D를 따라 카페로 들어갔다. 여기요. 아무거나 시원한 거 한 잔만 주세요. D는 카운터가 빈 것도 보지 못한 채 빈자리에 엎드렸다. 가져다준 물을 단숨에 마신 D는 그제야 나를 알아보았다. 어, 당신? 당신이 왜 여기? 휴. 나는 나도 모르게 한숨을 쉬고 카운터로 돌아갔다. 할 일이 산더미였다. D는 엎드려 잠이 들었다. 얇은 원피스 차림이었는데 등이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쌓아둔 무릎담요를 하나 가져다 펼쳐 덮어주었다. 그래도 D는 깨지 않았다. 


  어렸을 때 개한테 물린 적이 있어서요. 책을 보는 내게 D는 의자를 끌고 다가와 옆에 앉았다. 식은땀을 흘려 으스스한지 어깨와 팔을 주물렀다. 따뜻한 걸 좀 마시는 게 어때요? D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고구마 라떼를 묽게 타서 가져갔다. 적당히 스팀을 해서 미지근했다. 가끔 당이 떨어졌을 때 나도 자주 그렇게 마시곤 했다. 효과가 있는지 D의 혈색이 돌아왔다. 뭐 먹을 거 좀 없어요? 먹을 거라. 허니 브레드. 얼어 있던 거라 녹이는데 좀 걸리는데, 그거라도 괜찮으면. 응응. D는 과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나를 올려다봤다. 강아지 같은 여자네. 나는 허니브레드를 전자레인지에 해동시키며 생각했다. 굳어있던 설탕이 녹으며 달콤한 냄새가 났다. 포크와 칼을 가져다주는 사이, D는 허니브레드를 통째로 입에 집어넣고 있었다. 나는 억지로 웃으며 허니브레드가 담겼던 접시에 포크와 칼을 내려놓았다. 아무래도 우유가 필요할 것 같았다. 우유까지 마시고 나서야 D는 허리를 폈다. 와, 이제 좀 살겠네. 나는 혹시 아까 들었던 그 욕이 다시 튀어나올까 기대했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어쩐지 실망한 얼굴이 되어버린 내게 D는 눈동자를 굴리며 말했다. 흠흠. 아까는 고마웠어요. 아, 그거요. 별일도 아닌걸요. 아니요. D의 목소리가 커졌다. 나한테는 별일이었어요.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D는 벌떡 일어나 인사했다. 나는 그 과격한 인사법에 어쩔 줄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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