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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가 전우형 Mar 04. 2024

찬바람이 불던 곳

소설

  25. 찬바람이 불던 곳    


  공감은 누군가의 마음을 헤아리는 일이다. 그래서 노력이 필요하지만 때로는 의지와 관계없이 움직이기도 한다. 내가 그 사람이라면 지금 어떤 마음이 들까. 어떤 느낌을 받을까. 어떤 생각을 할까. 무엇을 필요로 할까. 어떤 음식이 먹고 싶을까. 어떤 글귀가 도움이 될까. 얼마나 추울까.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얼마나 보고싶을까. 얼마나 답답할까. 얼마나 이해받는다고 느끼고 있을까. 얼마나 외로울까. 얼마나 바쁠까. 얼마나 지칠까. 어떤 노래가 듣고 싶을까. 어떤 가사에 위로받을까. 대개 질문으로 시작해서 짐작으로 마무리되는 진실들. 어느 한쪽의 진실과 관심. 퍼즐맞추기를 하듯 관찰되는 반응들. 눈빛. 표정. 입술의 움직임. 손끝의 떨림. 그날의 옷차림과 혈색. 곳곳에 난 상처. 마시는 커피의 양. 의자를 밀어넣는 추임새. 비틀거리는 걸음걸이. 눈가의 주름. 화장의 진하기. 그리고 온전한 하나의 길고 짧은 숨소리. 그런 것들을 집중해서 감각해내다 보면 나도 모르게 그 사람과 깊은 공감을 이룬듯한 느낌에 빠진다. 마치 겨울바람 앞에 홀로 선 것처럼.


  나는 상상한다. 내게서 상한 부위를 도려내는 상상을. 마치 암덩어리처럼 어떤 상상은 전이되어 새로운 질량의 덩어리가 되고 나는 마음을 꺼내 빨래판에 박박 문질러도 때가 빠지지 않을만큼 지저분한 기분이 된다. 생선 가시처럼 앙상한 영혼과 부러져 목에 박힌 말들과 침을 삼키기도 버거울만큼 부어오른 목이 거추장스럽고 괴로워서 그 일체를 덜어내고 싶다고. 속에서 울컥, 쓴 물이 올라왔다. 목젖이 입천장에 달라붙은듯 하고 어디선가 웃음소리가 들린다. 귀를 막고 심장소리를 듣는다. 둥. 둥. 아주 먼 곳에서 포를 쏘는듯 하다. 행사의 시작을 알리는 함포소리처럼. 일제히 창공을 가르는 전투기 편대의 울부짖음처럼. 하얀 비행운을 수놓은 하늘과 바람이 불어오던 바다. 해변에 파도거품이 인다. 하얀 거품은 젖은 모래위를 치닫다 점차 옅어지며 사라진다. 


  마음은 둘로 갈라졌다. 공감하는 나와 공감하지 않는 나로 나뉘었다. 둘은 연결되어 있다. 투명한 줄이 둘 사이를 비춘다. 그러므로 인연을 담는 방식은 정직하다. 좋은 것과 나쁜 것이 고르게 정제돼 있다. 지구는 기울었지만 인간은 지구가 기울어진 걸 느끼지 못하고 산다.  


공간으로 바람이 흐른다. 바람이 한 바퀴를 돌고 탐색을 마친다. 가장 약한 곳을 뚫고 나온다. 가장 약한 곳. 처음부터 끝까지 찬바람이 불던 곳. 시작이었으나 이제는 마지막이 되어버린 곳. 인연을 구성하던 기억을 지나 기울어지고 텅 빈 나무의 가장 약한 곳에 구멍을 냈다. 수액조차 흐르지 않는다. 바람소리가 기괴하다. 나무가 우는 것처럼. 그러나 나무는 울지 않는다. 우는 건 바람이다. 바람이 울고 바람이 묻는다. 우리의 인연은 여기까지라고. 나무는 바람을 붙잡을 수 없다. 마른 가지로는 그럴 수 없다. 


  겨울이 잎을 앗아간 것이 아니다. 나무가 겨울을 버티기 위해 잎을 버렸다. 얼고 부풀어 조직이 망가지지 않도록 의도적으로 메말랐다. 잎을 내고 꽃을 피우지 않도록 스스로를 절망으로 채웠다. 겨울은 그런 계절이고 메마른 겨울은 아름답다. 여백이 많은 나무들이 가득한 계절. 찬란한 하늘빛이 나무 사이를 여과 없이 통과하는 계절. 쏟아지는 눈과 휘몰아치는 얼음이 나무를 덮고 긴 밤이 소란스럽던 하루를 진정시키며 따뜻한 불씨 하나가 소중해지는 계절.      


  나는 손과 발과 머리와 가슴이 차갑다. 겨울에 태어나 그런지도 모른다. 아이의 멋에 비수를 꽂고 기대를 꺾는다. 잘 보이고 싶은 마음에 찬물을 붓는다. 기다림을 허락하지 않고 기다리지 않는다. 기계가 되고 싶었다.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기계가. 예열을 마치고 아침을 기다리며 작동되는 순간마다 자신을 마모시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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