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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가 전우형 Mar 07. 2024

너의 고통은 나와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소설

  직접 말린 귀한 가재미를 이모가 한 보따리 담아주었다. "얼라들은 가재미 최고로 잘 먹재. 이래 직접 한 거는 밖에선 못 사 먹는다. 밥 지어가 하나씩 꺼내가 꾸워줘라." 애 엄마가 다 된 나는 이제 이런 생선이 너무 귀한 걸 잘 알아서 "이모, 고마워요" 보따리를 소중히 끌어안고 히 웃었다. 그러자 이모가 불쑥 북받치는 얼굴로 "어유, 애기야" 나를 콱 부둥켜안았다. 그러곤 손바닥으로 등을 쓸어주었다. "수리야. 너는 영영 늙지 마라. 지금처럼 영영 예뻐라.'(고수리, '선명한 사랑')




  27. 너의 고통은 나와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아침 7시에 집을 나섰다. 어제 못한 콜롬비아 로스팅을 마저 해야 했다. 엘리베이터에는 여전히 ‘교체 공사 중’이라는 안내 팻말이 대롱거리고 있었다. 벌써 3주째 나는 20층 아파트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하고 있다. 허벅지가 굵어졌고 간식을 챙겨 먹게 되었다. 천천히 계단을 걸어 내려가다 보면 아파트 주민들과 마주친다. 얼마 전 개학을 했고 아이들이 아침 거리를 채우기 시작했다. 아이들의 발걸음은 경쾌하고 빠르다. 뒤에서 후다닥 뛰어 내려오는 소리가 들리면 나는 벽 쪽으로 바짝 붙어 길을 터 준다. 뒤에서 누군가가 기다리는 느낌이 들면 나도 모르게 걸음을 서두르게 된다. 원치 않게 서두르게 되는 그 걸음이, 자꾸만 붙는 가속도가 나는 싫다. 그러면 내가 노후차가 된 느낌이 든다. 얼마 후 아래쪽에서 씩씩대는 숨소리가 욕을 하는 것처럼 들려왔다. 한 번은 20대 청년이었고, 다른 한 번은 아버지뻘쯤 되어 보이는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인이었다. 20대 청년은 화가 난 표정으로 두유 한 상자를 들고 있었고 노인에게서는 술과 담배 냄새가 풍겼다. 아침에 계단을 오르는 이들에게는 어떤 사정이 있을까. 누군가는 밤새 일을 했을 것이고 누군가는 아침까지 술을 마셨겠지. 아니면 둘 다거나. 4층에서 마주친 아주머니는 조용히 나를 향해 웃었다. 그런 웃음은 나를 반사적으로 웃음 짓게 한다. 그것이 서로를 향한 응원이건, 아니면 같은 상황에 처한 낯선 이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의 인사건, 나는 마음 한쪽에 소중히 간직한다. 어렵고 성가신 오르내림의 과정에서 속도를 높이고 세상을 저주하는 것보다 작은 설렘 하나라도 담아두는 편이 낫다. 


  나는 마주 오는 계단의 날카로운 모서리들을 바라본다. 예전에는 이런 계단들을 어떻게 뛰어 내려갈 수 있었을까. 겁도 없이. 두 계단씩 또는 네 계단씩. 성큼성큼. 어떤 때는 난간을 타고 한 번에 여덟 계단을. 그런 생각을 하며 계단을 조심조심 걸어 내려가다 보면 어느새 1층이다. 계단은 내려갈 때가 더 힘들다는 말을 이제는 이해한다. 인생의 내리막은 더 고단하고 씁쓸하다는 것을 안다. 세월이 알려주었다. 누가 가르쳐주지 않았다. 

      

  며칠 전부터 어지럼증이 늘었다. 시력이 마이너스인 아내의 돋보기안경을 쓴 것처럼 세상이 구불구불해 보였다. 멀어 보이던 것이 갑자기 확 다가왔고 손이 닿을 줄 알았던 곳에 손이 닿지 않았다. 아무래도 계단 때문일 거라고 나는 내게 위안을 건넸다. 그러나 좀처럼 불안은 가시지 않았다. 그런 채로 차에 탔다. 울렁거리는 속에서 무언가가 튀어나오려는 것을 온 힘을 다해 억누르면서.      


  그날따라 힘들어 보인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어디서부터 시작되었을지 짐작조차 할 수 없는 멀미가 그림자처럼 눈 아래에 붙은 느낌이었다. 산란된 빛이 거대한 주먹이 되어 동공을 두드리고 시야는 하얗게 변했다가 일시적으로 암흑에 빠진 것처럼 새카매졌다. 어지럼증은 해 질 무렵까지 이어졌다. 나는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먼 곳일수록 좋았다. 내가 볼 수 있는 가장 먼 곳. 산 너머 바다 너머 거대한 다리가 가로지르고 흰색 실선처럼 보이는 고속열차와 일개미 같은 자동차들이 소리 없이 유영하는 곳. 그리고 내가 낮에 볼 수 있는 것 중 가장 멀리 떨어진 태양. 8분 30초 전의 태양. 


  나는 입구에 내어놓았던 화분을 하나씩 카페 안으로 옮겼다. 쌀쌀했어도 좋았을 것이다. 나를 두드리던 빛무리들이 너희에게는 따뜻했겠지. 나는 눈을 감고 화분 두 개를 손에 쥔 채로 서 있었다. 비로소 눈꺼풀 위쪽이 따스해지는 걸 느꼈다. 그러고 보니 온종일 구름이었구나.      


  문득 어젯밤이 떠올랐다. 여섯 명이 모인 밤. 한 사람씩 소감을 이야기하던 우리. 배려와 격식을 갖춘 교양 있는 대화. 그러나 갑자기 튀어나온 오해와 비난. 일방적인 주장과 착각. 오만과 아집. 포기하는 마음. 실망하지 않으려는 각오. 미움을 밀어내기 위해 숨을 들이켜는 동안 경청하는 법을 모르는 미친개의 포효가 아프게 가슴을 찔러 왔다. 다투기 싫어 시선을 흐트러트린 채로 우리는 자리를 마무리했다. 그때부터 귀가 아팠고 돌아오는 내내 머리가 아팠다. 


  두통은 아무것도 대답해 주지 않았다. 모두를 돌려보낸 밤. 나는 손등의 상처 하나를 보았다. 빨갛게 부풀어 오른 상처. 불에 덴 것 같기도, 나무 모서리에 찢긴 것 같기도 한 상처. 나는 그 상처를 한동안 들여다보았다. 이유나 미련 없이, 상처를 들여다보는 일은 내게 일시적인 평화를 가져다주었다. 밤을 곰곰이 들여다보다 보면 별들의 색깔이 모두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다. 천문학자들은 그 색깔을 통해 별의 나이나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를 계산해 낸다고 한다. 그러므로 나는 상처를 들여다보다 보면 상처의 나이와 거리를 가늠할 수 있을 줄 알았다. 언제 다쳤고, 얼마나 다쳤고, 너의 고통은 나와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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