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작가 전우형 Mar 10. 2024

빈 노트

소설

  카페는 빈 노트 같아서 

  무엇으로든 채우고 싶어 진다 

  앉아 있다 보면 나도 빈 노트가 된다 

  느낌은 일부가 되고 

  천사가 필요해, 나는 중얼거린다




  29. 빈 노트    


  나무는 사람들 사이를 걷고 있었다. 바람처럼 차분히. 개미처럼 줄지어. 그리고 우주처럼 부지런히. 인간은 바닥에 뿌리내렸다. 나무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세세하게 뻗은 다리로 지층을 거슬러 물고기처럼 헤엄쳐 갔다. 나무는 스스럼없이 걸었다. 걸을 때마다 바스락 소리가 났다. 잎이 흩날렸다. 가지마다 수액이 흘렀다. 하얀 눈물자국이 옹이를 타고 둥글게 흐르다 굳었다. 나무는 이해하지 못했다. 기쁘지 않은 자신을. 나무는 움직일 날만을 고대해 왔다. 오랜 시간, 믿을 수 없는 별의 유영과 지구의 빛과 그림자를 바라보며.      


  인간은 어색한 자세로 눈을 굴렸다. 보이는 세상 속에서 현재를 파악하려 한다. 눈동자는 박제된 구슬처럼 빛났다. 구김 없고 반짝이는 눈동자였다. 눈물이 말랐다. 눈동자는 건조해지다 쪼글쪼글해졌다. 보고 싶지 않은 장면들로부터 눈을 돌릴 수 없게 된 인간은 피를 흘렸다. 나무는 가지를 뻗어 사람들의 눈을 가려주었다. 인간은 눈앞에 펼쳐진 잎사귀를 바라보았다. 잎에는 기찻길처럼 얽힌 잎맥이 있었다. 솜털과 아기 피부 같은 살갗이 있었다. 나무는 한없이 무언가를 보아야 하는 저주로부터 인간을 구했다. 의무나 부채감이 아닌 안타까움으로. 나무는 인간을 동정했다. 나무는 인간 옆에서 움직임을 멈췄다. 나무는 다시 나무가 되었고 인간은 나무 그늘에서 깊은 잠에 빠졌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자신이 나무 옆에 누워있다는 걸 알았다. 인간은 기지개를 켰다. 인간의 어깨에서 낙엽이 졌다.      




  카페를 자주 찾던 아이 중에 미소가 있었다. 미소는 말수가 적었다. 버스를 두 번 갈아타고 30분 걸어야 하는 거리에 학교가 있었다. 미소는 걷는 것이 좋았다. 카페에 가방을 벗어던지고서 미소는 동네를 걸었다. 마을버스를 놓쳤고 강아지의 환심을 사기 위해 개구리를 잡았다. 그러다 얼굴로 날아든 개구리 때문에 도랑을 굴렀다. 흙투성이가 된 채로 미소는 괜찮아, 걱정 안 해도 돼,라고 말했다. 미소가 처음 건넨 말이었다.    

  

  미소의 손은 상처가 많았다. 그리고 손톱 밑이 까맸다. 흙을 자주 만져서 그래요. 미소는 친해진 후에 말을 높였다. 그래. 나는 미소의 손을 닦으며 말을 놓았다. 말을 놓으며 마음도 놓였다. 미소는 카페에 올 때면 늘 내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아몬드 초콜릿. 망고 퓌레가 듬뿍 들어간 젤리. 하트가 그려진 백설기. 베이비슈. 곰 얼굴 모양 막대 사탕. 어디서 났어? 하고 물으면 미소는 고개를 숙였다. 정수리가 예쁜 아이였다. 가까이 가면 오븐에서 막 꺼낸 크로와상 냄새가 났다.      


  미소는 나와 공을 차면서 친구 이야기를 했다. 얼굴이 까만 미국 친구로 이름은 밴이었다. 밴은 할머니랑 산데요. 그리고 한국말을 잘해요. 어떤 때는 나보다 더 잘하는 것 같아. 밴이랑 있으면 내가 하찮아져요. 하찮다는 말. 미소가 스스로를 지칭할 때 곧잘 하는 말. 의미가 무겁고 미소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언어. 그러나 나도 곧잘 하는 말. 나도 그래. 나도 카페에 온종일 혼자 앉아 있으면 내가 하찮아진 것 같아. 삼촌은 어떤 느낌이에요? 음. 무생물이 된 느낌. 어떤 무생물? 음. 빈 노트. 빈 노트? 빈 노트. 빈 노트 미소는 곱씹는 걸 잘했다. 빠져들면 작은 입술을 조잘거렸다. 



이전 28화 밤을 빛내는 것은 달빛만은 아닌 모양이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