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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가 전우형 Mar 03. 2024

2월의 늦은 오후

소설

  밤이다

  나는 귀가를 서둘렀고

  고양이는 잠들어 있었다

  물과 사료를 채운 뒤

  서둘러 샤워를 했다

  물은 따뜻해지는데 한참이 걸렸다

  나는 부은 손끝을 만졌다

  딱딱하고 감각이 굼떴다

  플라스틱처럼 물이 겉으로 흐르다

  천천히 살에 스몄다

  마른 손의 감촉이 낯설지 않았다

  나는 그런 손을 가진 사람을

  적어도 한 명은 알고 있다




  24. 2월의 늦은 오후     


  으. 너무 추워. 몸이 꽁꽁 얼어서 스무디가 되어버릴 것 같아. 날씨에서 투게더 아이스크림 맛이 나. 

  그래? 나는 좋기만 한데.

  너는 추위를 정말 안 타는 것 같아. 겨울에 태어나서 그런가?

  나는 D가 한 말을 곱씹었다. 겨울에 태어났다, 라.

  D가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왜? 뭐 묻었어? 내 손은 어느새 입가를 문지르고 있었다. 거울을 찾아 일어서려는 내게 D는 고개를 저었다. 

  진짜 몰라?

  나는 D를 보면서 생각했다. 놀리는 건가. 아니면 내가 뭘 놓치고 있는 건가. 

  너 방금 따라 했잖아, 내 말.

  그랬나. 기억을 되짚어 보았다. 하지만 아니다. 나는 D가 한 말을 따라 하지 않았다. 

  그게 왜?

  D는 새초롬한 표정이었다. 

  캐러멜 시럽.

  뭐?

  너 지금 캐러멜 시럽이라고 했다고. 


  캐러멜 시럽. 아. 그걸 찾고 있었지. 캐러멜 시럽은 왼쪽에서 두 번째 칸에 있다. 나는 캐러멜 시럽을 세 번 짜서 유리잔에 담았다. 유리잔에서는 캐러멜 시럽 향이 났다. 바람이 유난히 차갑던 3월의 첫날, D의 7살 난 아들 민우는 내가 준 딸기 초코 스무디를 한번 쪽 빤 다음 이렇게 말했다. 투게더 아이스크림에 캐러멜 시럽을 탄 맛이라고. D가 민우를 데리고 온 건 까만 개 사건 이후 삼 년째 되던 겨울이었다.    

  

  D는 카페에 와서 자주 엎드려 잠을 잤다. 그토록 무방비한 여자는 처음이었다. 나는 D가 신기하면서도 두려웠다. 죽은 사람처럼 잠을 잔다는 게 이런 걸까. 어떤 밤을 보내고 왔기에 이토록 곤히 자는 걸까. 그것도 낯선 남자 앞에서. 내가 가끔 처음 본 날처럼 무릎담요를 덮어주어도 D는 놀라지 않았다. 다만 잠에서 깬 후에 배시시 웃으며 내게 손을 흔들었다. 무릎담요가 흘러내렸고 D는 그것을 주워서 손으로 툭툭 턴 후 아무렇지 않게 어깨에 다시 둘렀다. 뭘 입어도 잘 어울릴 것 같다고, 나는 생각했다. 자다 일어난 얼굴이 밉지 않았다. 

  겨울은 참 좋은 계절이에요. 

  맞아요. 라떼가 잘 팔리는 계절이기도 하고요.      


  D는 늦은 오후에 카페로 왔다. 30분 정도 앉아 라떼 한 잔을 천천히 마시고 갔다. D가 라떼를 마시는 모습은 독특했다. 오른손으로 잔을 들고 왼손으로 잔 아래를 받쳤다. 잔에 입을 오래 대고 있었다. 거품을 불었고 냄새를 맡았다. 볼이 부풀고 눈썹을 찡긋거렸다. 내내 잔을 내려놓지 않았다. D에게 아이가 있다는 건 감색 세단에 아이 머리가 보이는 것을 보고 알았다. 아이들은 차에서 내리지 않았다. 뭘 주면 좋을까. 고민하다가 결국 아무것도 건네지 못했다. 아이에게는 아이만의 법칙이 있을 것 같았다.      


 인연이라면 인연이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각자의 삶을 아꼈고 최소한의 공감을 나눴다. 원치 않는 동정을 건네지 않았다. 가끔 진심으로 안타까워했다. D와 나는 말없이 밖을 내다볼 때가 많았다. D는 점점 말수가 줄었다. D가 전하지 않은 말들이 마음에 새겨졌다. 흉금을 터놓을 사이는 아니었다. D는 간혹 자기 얘기를 했고, 대화는 산뜻하면서도 아팠다. D는 웃음기를 잃었고 멍해졌다. D의 세상에는 쏟아진 그릇 같은 이야기들이 있었다. D는 듣고 잊으세요,라고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것들은 모래였고 어떤 것은 진흙이었다. 손에 묻은 이야기들을 쥐어 모양을 만들었다. 일부는 남았고 일부는 가루가 되었다. 여과되지 않은 이야기 속에도 D는 없었다. D는 마모되고 있었다. 나는 문득 D가 처음보다 투명해졌다고 느꼈다. 그런 느낌이 들면 커피를 새로 내렸다. D의 잔을 채우는 행위가 볼품없는 위로라는 걸 알았다. D는 웃었다. 나는 일을 했고 D는 아이들을 챙겨 집으로 갔다. D가 카페를 떠난 시각은 12월의 해 질 무렵이었고, 2월의 늦은 오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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