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예쁘기만 한 것은 부끄럽다.

우물 안 곱슬머리, 캐나다에 가다

by 한사랑

직접 돈을 벌기 시작한 이후로 지출의 비중을 따져보았을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미용 지출이다. 곱슬머리 탓에 주기적으로 미용실을 찾았다. 염색을 하든, 펌을 하든, 일단 뿌리 매직이 필수였기 때문에 시간도 돈도 많이 들었다.


그러나 머리에 쓴 돈이 주는 행복의 유효기간은 길어야 한 달이다. 다시 뿌리부터 구불구불한 곱슬머리들이 자라 나왔으니까. 그래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곱슬 유전자를 물려준 친정엄마가 뿌리 매직 없이 파마 한 방으로 스타일링을 완성하는 것을 보며, 나이 드는 것만 기다렸다. '젊은 곱슬머리의 슬픔이겠거니' 하며 또 지갑을 열어야 했다.




캐나다는 한국보다 훨씬 멀티'컬(Curl)'쳐럴한 곳임이 분명하다.

길거리만 걸어도 다양한 곱슬머리들을 볼 수 있다. 동네 마트에서 곱슬머리 전용 제품을 쉽게 구할 수 있고, 곱슬머리 전용 미용실도 많이 있다. 그렇다고 해서 길거리 곱슬머리들이 모두 탱글탱글하게 관리된 것은 아니다. 여기도 부스스한 곱슬머리들이 정말 많이 있다.

그런데도 그들은 왜 곱슬머리를 펴거나 감추지 않을까?


그들이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방식은 실용성으로부터 시작했기 때문이다.

미용과 패션은 기후와 환경, 라이프 스타일의 산물임을 생각할 때, 캐나다의 뷰티/패션 산업은 역사적으로 추운 계절이나 야외활동에 적합한 것들이 주를 이뤄왔다. 그러한 방식은 큰 땅덩이와 적은 인구 탓에 캐나다 자체 브랜드보다 잉글리쉬맨의 정장, 미국의 캐주얼 등 외국 패션이 캐나다 시장을 지배했던 80-90년대에도 마찬가지였다. 캐네디언이 캐나다 땅에서 살아가는데 필요한 형태나 기능을 외국 트렌드에 적절히 결합하는 것이 그들 사업의 시작이자 핵심이었다.


결과적으로 캐나다 특유의 야외 감성과 라이프 스타일이 외국의 뷰티, 패션 흐름과 씨름하면서 점점 실용적이고 본능적인 캐나다만의 유니폼을 만들어 왔다. 캐나다 겨울 스포츠에서 유래되었다는 투크(털모자), 요가 팬츠로 유명한 캐나다 브랜드 룰루레몬의 레깅스, 캐나다 국민 브랜드 루츠의 스웻셔츠, 캐나다 구스의 파카 등이 그렇다. (아래 사진)


스노슈잉/토보가닝(눈썰매)에서 유래된 투크(좌)/룰루레몬 레깅스(우)
루츠의 스웻셔츠(좌)/캐나다구스의 파카(우)



결국 그들은 아름다워지기 위해 불편을 감수하기보다, 그들이 영위하던 삶을 살 수 있게 하는 아름다움을 찾아왔다. 대학생들은 트레이닝복에 커다란 백팩을 멘다. 등원 룩과 문센 룩은 꾸민 듯 안 꾸민 듯 고급스러울 필요도, 스타일리시할 필요도 없다. 수영을 할 때는 남녀노소 몸매와 상관없이 수영복을 입는다. 멋있어 보이기 위한 러닝 복장을 갖추지 않아도 누구나 반바지 하나 덜렁 입고 조깅을 한다. 하이힐을 신고 캠퍼스를 누리는 대학생은 그 어디에도 없다.

그들은 삶이 먼저다.

그것이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방식인 것이다.


그런 그들에게 매직 스트레이트 펌은 투자 대비 가성비가 너무 낮다.

한 달이면 끝나버릴 아름다움을 위해 그만큼의 돈과 시간을 소비하는 것은 실용성이 떨어진다. 다수 보통의 사람들이 가지는 자원과 에너지가 한정적이라 그렇다. 대신 유한한 것은 빼기가 있으면 더하기가 뒤따르는 법이라, 비효율적인 소비에서 아낀 돈과 시간은 자신이 추구하는 삶을 살아가는 데 사용될 수 있다.


한국과 캐나다의 삶의 방식을 비교하며 무엇이 우월하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캐나다에서는 '예쁘기만 한' 삶은 거의 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내 삶의 바운더리는 한국에서의 것이 훨씬 더 넓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1. 헬멧에 스포츠 선글라스를 쓴 사이클 복장이 '등원룩'인 엄마. 자전거 뒤에는 세 아이를 태울 수 있는 버기를 매달았다. 그녀의 머리는 늘 헬멧에 눌려있고, 얼굴은 아침 바람을 맞아 버석거렸다. 하지만 세 아이를 번쩍 들어올려 유치원에 보내고, 빈 버기를 매달아 왔던 길을 씩씩하게 돌아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고있자면, 강하고 아름다운 여성이란 저런 것일까 생각했었다.


2. 한국에서는 듣고 보도 못한 촌스러운 '문센룩'을 입은 캐네디언 할머니는 한국인 아기를 데리고 문화센터에 오신다. 한국인 아기가 입양될 때까지 맡아서 키우는 자원봉사를 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한국인인 나는 캐네디언 할머니 품에 안겨있는 한국인 아기를 보며 만감이 교차했었다.


3. 본인 덩치만 한 휠체어 유모차를 끌고 다니는 내 친구. 때맞춰 아이에게 먹여야 할 약이 한 짐인 백팩과 기능성 운동화, 그리고 맨 얼굴에 질끈 묶은 머리. 몇 년을 보았지만 그녀의 패션은 한순간도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휠체어에 타 있는 아이가 입양한 아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또 아이의 친부모와도 종종 시간을 보내며 도움을 주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마음이 숙연해졌다. 누구보다 아름다워보였다. 누가 그녀를 촌스럽다고 할 수 있을까. 감히 누구도 따라올 자가 없는 세련된 삶을 살아내고 있는데.




우리는 왜 머리를 펴야 했을까? 왜 그만큼의 시간과 돈과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했을까? 자기만족이라고 하지만 실은 ‘남이 봐주는 자신’을 위한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관중이 있어야 완성되는 행복은 삶을 낭비하게 할 뿐이다. 예뻐 보이기만 한 삶은 부끄럽다. 생머리에, 아니 생머리처럼 '보이는' 것에 내가 가진 자원과 에너지를 사용했다면, 내 삶에서 그만큼의 값어치를 가진 무언가는 포기했다는 뜻이다. 나는 무엇을 포기하며 살아왔을까?





참고 및 사진출처


Magazine, NUVO의 Canadian Fashion History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