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곱슬머리의 슬픔
학창 시절 두발 규정을 경험했던 80년대생들이 수능이 끝나고 제일 먼저 한 일은 무엇이었을까? 염색, 탈색, 파마. 그들은 수능이 끝나자마자 머리카락으로 한을 풀었다. 곱슬머리인 나 역시 미용실로 달려갔다. 브랜드 네임이 있는 고급져 보이는 미용실에 가서 비싼 매직을 했다. 가끔 동네 미용실에서 하던 판 스트레이트 펌 말고 뜨거운 열로 머리카락을 쫙쫙 펴 주는 '매직' 스트레이트 펌.
결과물은 그야말로 매직이었다. 텔레비전을 보다가도 거울을 들여다봤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어깨를 타고 흘러내리는 느낌이 좋았다. 나도 길게 풀어헤친 머리카락을 쓸어 넘길 수 있다니!
그러나 환희도 잠시, 그때부터 매직 스트레이트와의 지독한 악연이 시작됐다. 한 번 매직을 시작하면 6개월마다 한 번씩 매직을 해야 한다. 아니, 2주면 두피에서부터 꼬부랑 머리가 올라온다. 머리 할 때를 놓치면 고속도로 한복판에 비포장도로가 나타난다. 차라리 아무것도 하지 않았을 때보다 훨씬 우스꽝스럽다. 깜빡 잊고 정리 못 한 발톱처럼 온종일 마음이 오그라들고, 자신감은 바퀴벌레마냥 후다닥 사라지고 만다. '당장 미용실에 가야지, 머리 펴고 사람답게 살아야지.'
"어우, 숱 봐라."
"이 머리로 어떻게 살았대? 진짜 곱슬 심하네."
"이런 머리는 시간도 오래 걸려~~ 돈 더 받아야 돼."
"진짜 악. 성. 곱슬이네."
악성(惡性)
1. 악한 성질
2. 어떤 병이 고치기 어렵거나 생명을 위협할 정도로 심함
악성의 사전적 의미다. 고작 털일 뿐인 머리카락에 오죽하면 악성이란 단어를 붙여놓았을까? 의자에 앉아 꼼짝없이 견적질을 당하는 미용실 거울 속 내 모습이 점점 쪼그라들었다. 돈을 안 낼 것도 아닌데 무언가 죄송스러워 어색한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한다. 미용실 언니의 손목을 나가게 하는 이런 못된 곱슬을 가진 죄다. '정~말 펴기 힘들겠지만 내가 한 번 해보겠다'는 미용실 언니의 카리스마 넘치는 포부에 보탬이 되고자 대 여섯 시간을 목 한 번 돌리지 않고 꼿꼿하게 버티며 앉아있기도 했다.
그러나 점점 이 억지스러운 미용실 프로세스에 피로해진다. 나는 취업 후에 더욱 그랬다. 황금 같은 주말에 미용실 의자에 앉아 사실은 관심도 없는 잡지를 한 장, 두 장 넘기며 꼬박 보내는 반나절에 의문이 들었다. 내가 잡지를 읽고 있는 건지, 아니면 잡지 읽는 내 모습을 소비하며 버티고 있는 건지. 미용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잡지 속 FW 시즌 트렌드만큼 내 현실과 동떨어져 보였다. 두 세 사람이 달라붙어 두피가 사방으로 바짝 당겨지는데도 모가지에 중심을 잡으려 노력하는 나의 눈동자는 점점 초점을 잃어갔다.
영혼은 탈탈 털려 모래가 되고 월급은 탈탈 털려 텅장이 된다. 기본 삼사십만 원에 기장 추가로 가격이 올라간다. 높은 열을 가하는 작업이라 트리트먼트, 클리닉 같은 것도 필수다. 안 하면 매직 못해준다니 별 수 없다. 돈 주고 한 머리가 지저분해 보이지 않으려면 파마를 하던, 염색을 하던 일단 매직이 기본이다. 숱은 또 얼마나 많은지. 미용실 언니에게 내 월급의 상당 부분을 바친다. 6개월 후에는 또 정확히 똑같은 일을 반복한다.
할머니들이 두피부터 빠글빠글 볶는 이유가 이것인가 싶다. 호호 할머니가 돼서도 뿌리 매직을 하러 미용실에 가야 한다면 인생이 너무 피곤하지 않은가! 살면서 몇 번이나 삭발을 꿈꿨는지 모른다. 주차할 자리를 찾지 못해 한참을 헤매는 자동차처럼 버리지 못해 삼십 년 넘게 이고 지고 살아왔다. 정녕 곱슬머리는 이 지겨운 소비를 계속해야 하는 것인가? 그러다 곱슬 할머니가 되어 '까끌래 뽀끌래(깎을래 볶을래)'의 양자택일을 최후의 통첩으로 맞이해야 하는 것인가!
아무리 예쁜 하이힐이라도 삐걱대며 걸으면 안쓰러운 법이다. 본연적 의미를 상실한 치장은 리스크를 동반하며 결국 아름다움까지 잃게 만든다. 매직 스트레이트 펌도 그렇다. 매직 스트레이트 펌은 모발의 결합을 분해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원래의 결합이 분해된 모발을 높은 열을 가진 판 고데기로 편평하게 만들어 중화제로 고정시키는 작업이다. 원래 결합이 분리되어 약해진 모발에 높은 열을 가하기 때문에 많은 돈과 시간을 투자해도 드라마틱한 결과가 나오지 않을 때도 있다. 머리카락이 튀겨지고 구워지고 부서지는 손상을 입기도 한다.
그래서 매직 스트레이트 펌은 곱슬머리에게도 필수가 아니라 선택이 되어야 한다. 6개월마다 한 번씩, 혹은 몇 주마다 한 번씩 뿌리 매직을 해야 하는 줄 알고 살았다면, 우리에겐 다른 선택지가 있다. 원한다면 곱슬머리라 해도 매직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도 있다. 매직을 할 때마다 모발 결합의 분해와 함께 당신의 영혼과 지갑도 함께 분해되고 있다면, 이제는 곱슬머리를 있는 그대로 놓아줄 필요가 있다.
평생 떼어낼 수도 없는 곱슬머리와 원수처럼 지지고 볶지 말자. 내 머리 위 나만의 작은 화단을 가꾸자. 꽃이 자랄 땅이 건강한지 점검하고, 어떤 컬(Curl)을 맺는지 파악하여 그에 알맞은 영양분을 공급해 주자. 곱슬머리는 가꾸는 대로 자라날 수 있는 잠재력이 있어서 나도 모르고 있던 꽃을 피워낼지도 모른다. 어떻게 관리하느냐에 따라 곱슬만이 가지는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도 있고, 숨어있던 자신의 컬을 평생 보지 못할 수도 있다.
그동안 미운 우리 곱슬머리는 자동차에 엔진오일을 넣듯이 6개월마다 미용실에 가야 했다. 그러나 우리는 업그레이드를 받아야만 제 성능을 낼 수 있는 자동차가 아니다. 비 오는 날마다 노심초사하고, 여행 갈 때마다 드라이기와 고데기를 바리바리 챙겨가야 하는 번거로움을 버리고 곱슬머리로부터 자유하자. 곱슬머리를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도 돈과 시간이 절약되고 한결 단순해진 삶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구제불능인 줄 알았던 곱슬머리가 사실은 내 얼굴형과 가장 찰떡인 컬 모양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설레지 않은가, 매직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