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존법을 멈춰주세요

제육볶음 나라의 신입 앨리스 #5

by 생각할 윤

동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체셔 고양이가 긴 유명한 어록이 있다. 체셔 고양이는 '이 나라의 이상한 사람들과는 대화하고 싶지 않다' 라고 말하는 앨리스에게 이렇게 말한다.

"여기 사는 사람들 대부분은 미쳤어. 나도, 너도.

앨리스는 부정한다. "나는 미치지 않았어."

"그럼 네가 여기 왜 있겠니."


굵고 힘있는 체셔 고양이의 말처럼, 회사에 있는 나도 회사 속의 이상한 사람, 이상한 문화에 영향을 받지 않고자 하지만 사실 이미 이상해져 버린 것은 아닌지 괜히 의심을 할 때가 있다.



기업 문화에 대한 인식이 개선되면서 남초 회사인 우리 회사도 불필요한 문화들이 많이 줄었다. 다만, 아직까지도 암암리에 남아있는 고 이상한 관습 중 하나는 압존법이다. 살면서 압존법을 접해볼 일이 없었던 나에게 압존법란 낯설고 어려운 존재였다.


그 존재를 알게 된 것은 팀장님께 업무 보고를 하던 날이었다.

"최종 보고서는 ○○ 과장님이 작성해서 보고하실 예정입니다."

보고를 마치고 자리에 돌아오니 고 대리님이 슬쩍 내 옆으로 다가와 조용히 말하셨다.

"앨리스 씨, 혹시 압존법 알아요?"

"네? 처음 들어봤는데요.. 그게 무엇인가요?"


고 대리님은 압존법이 무엇인지 자세히 알려주었다. 내가 언급하는 대상보다 더 직급이 높은 자에게 말을 해야 할 경우, 높임말을 생략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대상자의 성함을 말할 때도 이름만 말하는 것이 아닌, 성까지 말해야 한다. 즉, 아까 내가 팀장님께 보고를 했을 때에는 "최종 보고서는 한○○ 과장이 작성해서 보고할 예정입니다."라고 말을 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인턴 교육 때도, 신입사원 교육 때도 이런 것을 배웠던 적이 없다. 혹시 나만 몰랐던 비즈니스 매너인 건가 싶었다. 낯설지만 그 후로 누군가에게 업무 보고를 할 때에는 압존법을 쓰려고 노력했다.

"과장님, △△ 대리님이.. 아, 고△△ 대리가 회의실 예약했답니다."

의식을 하지 않으면 아차차 하며 말을 더듬기 일쑤였다. 도무지 이놈의 압존법은 입에 붙질 않는다. 압존법을 쓰는 게 도대체 어떤 장점이 있는 것인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끊임없이 들었다.




압존법에 대해서 검색해 보니 회사에서는 계급문화의 잔재로 여겨져 기업에서도 폐지를 하는 수순이라는 기사를 보았다. 고 대리님과 점심을 먹다가 압존법에 대한 얘기를 했다.

"대리님, 근데 압존법 폐지하는 추세라는데 꼭 쓰는 게 맞나요?"

고 대리님은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사실 좋은 문화는 아니니까 안 쓰는 게 맞아요. 근데 우리 회사 팀장, 임원들 세대는 압존법에 익숙한 세대라 괜히 책 잡힐까 봐 말씀드린 거예요. 팀원끼리는 안 써도 돼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인사팀은 수직문화를 없애자고 회사 곳곳에 포스터까지 붙이는 판국에 압존법을 쓰는 게 맞나? 조직의 룰은 신입의 자세로 고분고분하게 수용하는 편이지만, 이것은 용납할 수 없다. 그 후로 나는 압존법을 쓰지 않았다. 혹시 누군가가 책을 잡는다면, 압존법은 안 쓰는 추세인 것으로 알고 있어서 쓰지 않았다고 말할 생각이었다. 그러면 압존법을 왜 안 쓰냐고 책을 잡는 본인도 차마 강요를 하진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의외로 압존법을 안 써도 나에게 뭐라 하는 사람은 없었다. 쓰는 사람들만 여전히 지킬 뿐이었다.


압존법이든, 아직도 교묘하게 쓰이는 '다, 나, 까'든, 업무에 도움이 되지도 않고 조직문화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들에 대한 제거가 필요하다. 아직은 힘없는 신입사원이지만 이 문화를 후배에게 물려주지 않도록 '압존법 폐지 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해야겠다 다짐하며 오늘도 깍듯이 존칭을 붙이고 있는 나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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