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육볶음 나라의 신입 앨리스 #10
어느덧 신입 티를 조금씩 벗어가고 있는 막내 사원은 정시 퇴근을 늘 오매불망 기다린다. 이제는 팀원이 야근을 하고 있어도 눈치를 보지 않고 슝- 퇴근을 하는 수준이 되었다. 고대하던 퇴근이 5분 정도 남았을 무렵, 옆자리에서 무료하게 마우스 클릭을 하시던 한 과장님이 내게 넌지시 물으셨다.
"앨리스 씨, 오늘 끝나고 뭐 해?"
"집에 가려고요."
갑자기 과장님의 눈이 반짝이는 것이 보인다. 그 눈 뒤에 숨은 의도가 있음이 느껴졌다.
"옆팀 팀원 몇 명이랑 저녁 먹기로 했는데 저녁만 먹고 가."
한 과장님은 번개 회식을 잘 만들기로 유명한 분이다. 그의 옆자리인 나는 주 타겟이 된다. 그에게 당해서 참여하게 된 회식이 한두 번이 아니다. 더 이상 넘어가지 않으리라.
찰나에 여러 생각들이 머리를 스쳤다. 몸이 안 좋다고 할까, 피곤하다고 할까, 다이어트 중이라고 할까. 하지만 이미 대답을 하기엔 너무 늦어버렸고, 저녁을 함께 하자는 과장님의 간절함이 눈에 한가득 담긴 것을 보았을 때 결국 나의 입은 내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말을 하고 있었다. '회식 거절 못해'병이 또 도지고 말았다.
"그럼 밥만 후딱 먹고 갈게요!"
남초 회사의 회식 메뉴에는 양대산맥이 있다. 삼겹살과 치킨. 나름의 변화를 준다면 그저 브랜드만 바뀌는 것일 뿐, 메뉴는 거의 바뀌지 않는다. 그날도 우리는 삼겹살을 먹으러 갔다. 삼겹살 집에 도착하니 이미 옆팀 팀원분들은 자리를 잡고 고기를 굽고 계셨다. 그 누구도 강요하지 않지만, 회사의 막내는 엉덩이를 붙이고 있지 못하는 법이다. 의자에 가방을 놓고 셀프 반찬과 앞치마를 주섬주섬 챙겨 테이블을 세팅했다. 옆팀의 대리님은 소맥을 황금비율로 말았다. 소맥 4잔이 짠! 부딪히며 최고의 분업으로 성대한 저녁자리가 시작되었다.
남자들의 식사자리는 그리 많은 대화가 오가지 않는다. 특히나 맨날 보는 직장 동료들 사이에 나눌만한 대화소재는 많지 않다. 회사일 얘기를 한다면 '요즘 그쪽 팀은 어때요?'로 대화가 시작된다. 요즘의 업무나 팀장님에 대한 얘기가 소소히 오가다가 '그냥 하는 거죠 뭐.'로 회사라는 소재는 늘 마무리된다. 회사 얘기가 끝나면 다음 이야기 소재인 '육아'로 넘어간다. '아이들을 잘 크고 있어요?'라는 질문으로 두 번째 라운드가 시작된다.
유아기의 자녀를 가진 대리님은 아이가 떼를 너무 써서 힘들다고 답하고, 초등생 자녀를 가진 과장님은 아이가 아이브 콘서트를 너무 가고 싶어 해서 고민이라고 답하셨다. 내가 모르는 세상의 대화들이 오가면 나는 냉큼 잘 익은 고기들을 주워 먹는다.
그렇게 몇 차례의 라운드가 돌면 이야깃거리가 정말 마땅치 않다. 그럴 때 사람들은 막내에게 눈빛을 보낸다.
'요즘 뭐 재밌는 일 없어?'
수건 돌리기 게임처럼 수건이 나에게 떨어진 느낌이다. 하루하루를 회사-집-운동의 트라이앵글로 겨우 살고 있는 막내는 급하게 머리를 굴린다.
'아.. 별일 없다고 하면 노잼이라고 한소리 들을 것 같은데.. 재미난 소재 없나..'
겨우 생각해 낸 것은 요즘 핫한 드라마나 예능을 보셨는지에 대한 질문이었다. 요즘 제 또래들 사이에서는 넷플릭스 시리즈 OOOO를 보는 게 유행인데 이 드라마를 보셨냐고 물어보았다. 절반은 보셨고, 절반은 아예 모르는 눈치다. 그 드라마가 얼마나 재밌었는지, 배우들의 연기는 어땠는지에 대한 소소한 대화들이 오갔다. 드라마를 본 사람만 공감할 수 있는 소재여서 그런지 이 소재도 얼마 못 가 효력이 끝났다. 이렇게 한 소재에 대한 라운드가 짧게 짧게 진행되며 1차가 끝났다.
"갈 사람은 가고, 더 마실 사람은 2차 가시죠."
네 명 중 두 명은 귀가를 선택했고, 두 명은 2차를 선택했다. 귀가를 선택한 두 명 중 한 명은 나였다. 인사를 드리고 버스를 타러 가려는 찰나, 남은 두 명의 눈빛이 또다시 나의 발걸음을 잡았다. 입으로는 '잘 가'라고 하지만, 눈으로는 '한잔만 더 하자'라는 그 눈빛. 이번에도 그 눈빛에 못 이겨 바로 옆에 있는 맥주집으로 향했다.
2차 때는 또 무슨 얘기를 해야 하지, 대학생 때 연애사를 말해야 하나. 세대차이 얘기를 하면 좀 재밌으시려나? '회식 거절 못해' 병에 걸려 2차까지 하게 된 막내는 이번에도 지키지 못할 말을 한다.
"저 진짜 딱 한잔만 하고 갈 거예요!"